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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2002년 5월호 [월간 국악](서울:국악중심) {명인 명창 박물관(4)}에 실린 글의 초고이다.
돈돌날이 명창 김어금<2>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예전에 토성리에서는 매년 대보름 이틀 전 오후 5시 무렵부터 대보름 오후 6시 무렵까지 정월 대보름 사자놀음을 하였다 한다. 이런 놀음은 토성리에만 있었고 때문에 이때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이 놀음에 참여하여 수 천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일제 때 순사 허가를 받고 정월 5∼10일 이 무렵에 풍수책 보는 사람들한테 날을 받아서 신청에서 도가이지(고사)를 지내고 나서 대보름 이틀 전 오후 5시 무렵부터 놀음을 하였다 한다.
김어금의 부친 김종순이 바로 이 토성리 정월 대보름 사자놀음의 총 책임자였으며 옛날에 음률도감을 지냈다 한다. 김종순은 피리, 퉁소는 안했고 사자춤, 넋두리춤, 관원놀음, 정(징), 제금, 노래를 잘했다 한다. 김어금의 조부와 조모, 그리고 김어금의 큰아버지와 세 고모는 이런 민속 놀음을 안했다 한다.
음력 정월 13일 신청 마당에 돛자리를 펴고 이 마을 축제를 위한 고사를 지낼 때 김어금의 부친 김종순과 일 맡은 사람들 몇 명만 신청 마당에 들어가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그 고사장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고사를 지낼 때 돼지 국물에 쌀로 죽을 써서 그 그릇을 부엌, 장독, 굴뚝에 놓는다고 한다. 고사 지내는 날 북을 초저녁에 한번, 12시에 두 번, 3시에 세 번 두드린다고 한다. 아주 옛날에는 소를 잡았지만 김어금 어린 시절인 일제 때는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고사가 다 끝나면 마을 청년들이 신청 대문 앞에 매놓았던 새끼줄과 소나무를 세워 막아 놓은 걸 다 치우고 마을 사람들이 들어가서 흥겹게 춤을 추고 노래하고 풍악을 울리고 논다고 한다. 함경도에선 무당을 호세미라 이르는데 토성리 마을 보름 축제 때 무당은 참여하지 않고 굿 또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축제 때 팥, 강낭콩을 삶아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한다. 그리고 밤에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성을 돌면서 <돈돌날이>를 부르고 2명이 사자춤 추고 퉁소 3∼4명이 불고 일명 군악대로 불리는 3명이 나발을 불고 피리, 정(징), 북을 연주했다 한다. 꽹과리, 대금, 해금 연주는 없었다 한다. 그렇게 지
칠 때까지 놀다가 횃불 끄고 흩어지고 더 놀 사람들은 성 주위에 남아서 밤새 놀기도 했고 공청(노인정)에서 뒷풀이를 했다 한다. 그땐 이렇게 안놀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다.
성을 돌 때 남녀노소 구별이나 순서 없이 섞여서 돌았고 선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따로 없고 <돈돌날이>를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잘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서 매기고 받고 했다 한다.
그때 성 주위를 돌면서 몇몇 사람들이 불던 피리 가락이 아주 독특했고 지금 눈물나게 그리운데 이 가락을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밖에도 김어금 고향의 퉁소 가락 가운데 사라진 가락이 있는데 이 또한 지금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고 그립다고 한다. 김어금 어린 시절에 이런 마을 축제가
열리면 동네 사람뿐 아니라 타지역에서 전문 악사들이 자작 찾아와서 연주하곤 했다 한다.
이 마을 놀음을 위해 고사를 지낸 신청은 토성리 한복판에 있었다 한다. 악기, 사자탈 등 사자놀음 행사 용품들은 모두 신청 창고에 보관하였고 이를 관리하는 관리인 한명이 있었다 한다. 관리인은 고지기라 했는데 보통 40대 이상 되는 사람에게 이 관리일을 맡겼고 너무 나이가 많으면 안됐고 이 관리인은 음률에
는 재주가 없었다 한다. 집집마다 봄, 가을로 보리, 옥수수 등 형편 되는대로 닷되씩 걷어서 신청 관리인에게 주었는데 이를 가국이라 했다 한다.
김어금이 어린 시절 고향 토성리에서 본 사자의 탈 모양은 지금 서울에서 문화재 전수를 위해 쓰는 것보다 넙죽했으며 털 색깔은 노란색이었고 사자의 피부는 헝겊으로 만들었다 한다. 이 사자 모형은 누가 만들었고 누가 보수했는지는 김어금이 잘 모른다고 한다. 사자는 반드시 한 마리당 두 사람이 들어가서 춤을
추었다 한다.
이 두 마리의 사자는 동네를 한바퀴 돌며 잡귀를 없애기 위해 집집마다 들어가서 춤을 추고 술 한잔씩 얻어 먹고 나오는데 보통 평민 집에는 안들어가고 보름 행사 요원, 중군(횃불 키고 끄는 일 관장하는 사람), 병사, 관원 집, 넉넉하거나 글 읽은 집에만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사자 앞쪽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사자탈 입에 뚫린 구멍으로 두 손을 내밀어 화로를 붙잡아서 마치 사자가 화로를 입에 물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동네를 한바퀴 돈다고 한다.
또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사자 안에 들어가서 번갈아가며 춤을 추었다 한다. 하지만 여자는 사자춤을 출 수 없었고 남자만 사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위험하지만 액을 물리치고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춤추는 사자 위에 올려 놓기도 했다 한다.
북청 사자놀음에 나오는 거사, 사당춤은 요즘과 비슷했다고 한다. 이 마을 행사 때 사당패가 와서 같이 노는 건 김어금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내 딸 봉섬이} 전설은 김어금이 잘 모른다고 한다.
김어금 고향 토성리에서는 단오, 한식, 추석 이튿날에 동네 사람들이 강변에 모여서 조촐하게 <돈돌날이> 등을 부르며 놀았다 한다. <돈돌날이>가 무슨 뜻인지는 김어금이 모르는데 자신이 부르고 있는 함경도 민요 가운데 이 소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거스러미> 등 현재 불리고 있는 대다수의 함경도 민요가 일제 때 생긴 것이라 한다.
<돈돌날이>와 <거스러미>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부르지 못하게 규제한 바 있다고 한다. <거스러미>가 무슨 말인지 김어금은 잘 모른다고 한다. 김어금이 이런 고향의 민요를 누구한테 특별히 배운 것은 아니고 어려서 동네 어른들 따라서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라 한다.(1999.8.25.15:40∼18:30.서울시 강남구 선릉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지하4층 연습실에서 김어금 증언)
- 끝 -
2002년5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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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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