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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굿 명창 이은관<2>
* 이는 2002년 4월호 [월간 국악](서울:국악중심) {명인 명창 박물관(3)}에 실린 글의 초고이다.

배뱅이굿 명창 이은관<2>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961년 발행된 {국악 예술인명감}(서울:국악계사내) 191쪽에 의하면 이은관은 1918년 제일극장 출연, 1919년 국도극장과 시공관 출연, 1959년 <<전국 순회 시민 위안의 밤>> 공연 등의 활동을 한 바 있다고 하는데 이은관이 1917년 생이니 1918년, 1919년 공연이라는 이 문헌 기록은 오류라 하겠다.
이은관은 6.25사변 직후 고려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 배뱅이굿(감독:양주남)에 건달박수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배뱅이 역은 조미령, 배뱅이 모친은 석금성, 동네 박수 역은 박천복, 서울 무당 역은 이진홍이 맡았고 이 영화는 수도극장(스카라극장의 전신)에서 개봉되었다. 참고로 1958년 1월 8일자 {매일신문}에 명성가극단 영화 배뱅이굿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1959년 7월 1일 발행된 {국악계 제2권}(서울:국악계사) 67쪽 국악계 뉴스에 의하면 이은관은 1959년 김옥현, 모영월, 윤일지홍, 고춘자, 고백화, 김봉업, 이소희, 박천복과 함께 장소팔 만담 클럽(대표:장소팔)의 일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한다.
이은관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킹스타, 오아시스, 대도, 신세기, 지구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무수히 많은 배뱅이굿 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그리고 이은관은 1969년 제2회 한국문화대상 성악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를 보도한 1969년 9월 16일자 {서울신문}에서는 <<경서도 창자로 가장 활약이 많은 남창, 대표 작품:배뱅이굿 서도잡가>>라고 이은관을 소개하였다. 다음은 1970년대 중반 이은관의 주요 공연 활동 내용이다.

1975년 11월 6일 국립극장 소극장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경기12잡가 제2회 발표회에서 이은관 배뱅이굿 공연함.
1975년 12월 6일 국립극장 소극장 이은관 서도창 발표회
1976년 4월 17일 국립극장 소극장 제2회 이은관 서도창 발표회

1980년대에도 이은관의 배뱅이굿 공연은 계속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는 서울놀이마당에서 거의 매년 공연을 하였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이은관 창본이 인쇄물로 나온 바 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나온 이은관의 배뱅이굿 음반에는 거의 대부분 사설이 실려있다. 1957년에는 이은관의 소리를 최상수가 채록한 배뱅이굿 창본이 발표되었고({민속학보 제2집}), 1961년 김동욱 저서 {한국 가요의 연구}(서울:을유문화사) 418∼437쪽에 1954년 채집된 이은관 배뱅이굿 창본이 실렸다. 이 가운데 참고로 1961년 김동욱 저서 {한국 가요의 연구} 418쪽에 의하면 김성민은 이은관보다 10세 가량 연상이고 이은관의 스승 이인수는 1930년경에 작고하였다 한다.
1962년에는 {포켓민요}(서울:세광출판사) 191∼205쪽에 이은관 배뱅이굿 창본이 실렸다. 이는 오아시스레코-드 취입 총 3장짜리 이은관 배뱅이굿 유성기음반의 사설을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창본에는 유성기음반 제1면부터 6면에 이르기까지 음반의 면수가 명시되어 있고 창, 해설(이야기 말), 후렴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각 대목의 사설을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1976년 이창배 저서 {한국 가창 대계}(서울:홍인문화사)와 1980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35호}(서울:문화재관리국), 1984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56호 배뱅이굿}(서울:문화재관리국), 1992년 황용주 편저 {한국 경서도 창악 대계-국악 교재 하권}(서울:선소리 산타령 보존회)에도 이은관의 배뱅이굿 창본이 실린 바 있다.
또 1999년에 발간된 이은관 편저 {가창 총보}(서울:제일악보사) 293∼331쪽에 이은관 배뱅이굿 사설이 실렸다.
참고로 이 {가창 총보} 332∼354쪽에는 이은관 작사 작곡의 배비장타령 창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배비장타령은 이은관이 1960년대 초반에 이충선(피리)과 최창남(장고)의 반주에 맞춰 장시간음반(LP)에 취입한 바 있다.(엘케엘레코-드회사 LKL-113, 10인치 1LP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 10인치 LP 관리번호 MI10LP-0112)
이 배비장타령 역시 배뱅이굿과 마찬가지로 서도식 판소리라 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 박동진 명창이 지은 판소리 배비장타령에 견줄 만한 주목되는 신작국악으로 평가된다.
이은관 명창은 자신의 출생과 소리 학습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이 증언 내용 소개하면서 본 글을 마친다.

나 이은관(李殷官, 본명:이은관)은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회산리 92번지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 이윤하, 어머니 길 모(吉 某) 사이에서 태어난 4남 4녀 중 장남이다. 내 위로 누나 둘이 있고 바로 아래 남동생 이은혁, 그 아래에 차례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이은일, 여동생 하나, 막내 남동생이 있다. 막내 남동생은 갓난아기 때 죽었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장수하여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국악을 한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아버지께서는 전문 국악인은 아니었으나 간혹 메나리조로 민요를 부르곤 하셨고 목성음이 무척 좋으셨다.
내가 살던 강원도 이천에서는 경기도, 강원도, 이북 민요가 두루 불렸지만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민요는 주로 이북 소리였다. 내 고향 이천은 행정 구역상은 강원도지만 황해도와의 접경 지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부르던 민요나 무당들의 굿이 거의 이북식이었다. 강원도 이천은 빈촌이라서 굿이 매우 드물었다. 내가 고향 이천에서 굿을 본 것은 내 나이 10대 중반(1930년대 초반) 때인데, 그 때 두 차례 굿을 본 기억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고향에서 이천공립보통학교까지 다니고 외지로 나갔다.
나는 어릴 때 친구 김창재와 함께 어울려 다니며 재미로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18세(1935년) 무렵에 김득수라는 사람과 황해도 황주에 가서 재니(재인)들과 함께 어울려 떠돌이 공연 단체에서 잠시 음악 활동을 했다. 당시 이길수라는 모개비(단장)가 그 단체를 이끌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 구별을 잘 몰랐는데 황주에 가니까 그런 구별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재니)이 상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소리하는 사람은 양반 대우는 못받아도 상놈 취급은 받지 않았다.
내가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황주에서 생활하던 바로 그 시절, 내 나이 10대 후반 때 일이다. 그 당시 나는 황주권번에 소리 선생으로 있던 이인수(李仁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뱅이굿>을 비롯한 여러가지 서도소리를 배웠다. 당시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소리를 함께 배운 동창생으로는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모(某) 씨, 그리고 황덕렬 씨가 기억난다. 지금은 진주라는 사람의 성씨는 기억나지 않는데 얼마 전까지도 살아있었다.
나는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나온 20대 초반에 장연권번에서 잠시 소리 선생을 했고 종로권번에서 서너달 가량 활동했다. 당시 나는 요리집에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는데 한번 불려 가면 10원 정도 받았다. 종로권번은 황명선 씨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황명선 씨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종로권번에서 활동했다. 황명선 씨는 나보다 15세 가량 연상이었고 내가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최경식 선생님 문하에서 경기민요와 시조를 사사했다. 그 후 잠깐 고향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왔다. 그 뒤에 가설 무대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박진 씨의 소개로 1940∼1945년 무렵에 신불출 씨가 이끌던 극단 신불출 일행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신불출 씨의 극단은 주로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신불출 씨의 단체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 이들은 김계춘, 박천복, 신옥란 씨 등이다.
광복 후 나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60년대까지 박천복, 장소팔, 고춘자 씨 등과 함께 유랑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리고 방송 활동, 해외 공연 등을 하며 바쁘게 활동해 왔다.(1996.1.27.17:30∼20:00.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 이은관 서도소리 전수소에서 증언)
- 끝 -

2002년4월26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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