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earkoreaTV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 음반    
매체별 유성기음반(SP) | 10인치 장시간음반(LP) | 12인치 장시간음반(LP) | 컴팩트디스크(CD) | 카세트테입(MC) | 디지털오디오테입(DAT) | 릴테입(Reel Tape)
마이크로카세트테입(MCT) | VHS 비디오테입 | 8mm 비디오테입 | 6mm 비디오테입 | 레이저디스크(LD) | 시디롬(CD-Rom) | 디브이디(DVD) | 기타자료
장르별 단가 | 판소리 | 창극 | 가야금병창 | 거문고병창 | 산조독주 | 산조합주 | 산조기타자료 | 시나위독주 | 시나위합주 | 삼현육각 | 사관풍류 | 사물놀이
민요연주 | 봉장취 | 민속무용 반주음악 | 기타민속기악 | 정가 | 정악기악독주 | 정악기악합주 | 민요 | 불교음악 | 무속음악 | 민속놀이ㆍ연극 | 풍물
전통춤 | 신작국악

 
판소리 명창 박동진 증언<1>
* 이는 2002년 1월호 [월간 국악](서울:국악중심) {명인 명창 박물관(1)}에 실린 글의 초고이다.

판소리 명창 박동진<1>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2002년 새해 [월간 국악] 개편에 따라 {명인 명창 박물관}이라는 연재 코너를 신설하였다. 이 지면에는 국악음반박물관(경기도 양평 소재, http://hearkorea.com)에 소장되어 있는 희귀자료들, 그리고 노재명 관장이 전국을 누비며 조사한 내용 등으로 채워질 것이다. 주로 20세기 국악의 역사, 명인 명창들의 흔적을 여기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편집자 주)

박동진 명창은 오늘날 판소리의 대명사라 할 만큼 온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 학습 내력과 발자취, 여러 자료들을 여기 모아 보았는데 다음은 박동진의 회고담 일부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박동진의 증언은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그간 학계에 별로 보고된 바가 없는 내용을 위주로 하였다.

박동진(朴東鎭:본명)은 1916년 7월 12일(음력, 호적도 동일) 충남 공주시 무릉동 370번지에서 태어났다.
박동진은 28세 무렵에 6,7년간 경주 거부 최순, 최윤 형제의 풍류방에 몸담고 있었다. 최윤은 당시 73세 정도였는데 일찍이 조영감한테 안성토리의 거문고풍류를 사사했고 판소리, 거문고, 바둑, 서화를 좋아했다 한다.
이동백과 송만갑이 여름에 최윤 집에서 지내곤 했는데 최윤은 송만갑의 소리를 더 높이 쳤다. 이동백은 적벽가를 통성으로 잘 불렀는데 최윤이 평하기를 소리를 잘하긴 하나 소리가 쭉 뻗질 못하는 준무데기 소리라고 했다 한다. 이동백은 김정근, 김세종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김세종은 유식하기는 하나 이론에만 밝고 실제 소리는 잘 못했다 한다.
가왕 송흥록은 여산 송씨이고 며느리 따라서 함흥 길주에 갔다가 거기에서 타계했으며 송흥록 누이가 김성옥과 혼인했다. 김성옥은 진양조를 창조했고 이걸 송흥록에게 알려줬다 한다. 김성옥은 말년에 학슬풍에 걸려 걷질 못하고 방에 들어 앉았다. 김성옥 작고 후 그를 묘에 묻었는데 그 근처에서 상여소리가 났다는 전설을 박동진이 들은 바 있다고 한다.
송우룡이 아들 송만갑에게 <<날 다려가오∼>> 하는 춘향가 중 <이별가>를 가르치는데 송만갑이 왜 동편 송판으로만 하느냐 하자 송우룡이 나가라 하여 송만갑은 집에서 쫓겨나 자득했다 한다. 송만갑의 제자 중에는 김일선(여자)이 수제자인데 소리 잘하고 재주가 있었으나 김모씨가 머리 얹히고 데리고 사는 바람에 소리를 작파했다 한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에 언급되어 있는 강경의 일끗리는 지금 강경의 북동 마을인데 거문고산조 창시자 백락준은 북동 산 동쪽 사람이고 명창 김성옥은 북동 산 서쪽 사람이다. 이는 박동진이 14세 때 이곳에 가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당시 백락준과 김성옥 모두 세상을 뜨고 없었으며 이 김성옥 고향은 김정근 고향 서천과 가깝다고 한다.
김정근은 자식이 여럿 있었는데 알려진 이는 김창룡과 김창진이고 이 가운데 김창진은 박동진의 소리 스승이다. 본래 김창룡은 소리 광대이고 아우 김창진은 고수였다. 그래서 형제간이라도 한집에 공연을 가면 대우가 달라서 밥도 따로 먹었으며 이런 데 불만을 품은 김창진이 도망을 가 무량사로 들어가서 10년 소리 독공을 했다. 이때 김창진이 식음을 잊고 소리에만 전념하여 나중엔 뼈만 남고 옷이 다 너덜너덜 해졌다 한다.
김창진 같이 진양조를 느리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걸 {삼공잽이 진양}이라고 했다 한다. 박동진은 춘향가 중 <회동 성참판> 대목을 엇중모리가 아니라 엇모리라 한다고 하였다. 박동진 어려서는 이 <회동 성참판>이 없었고 이는 정정렬이 지어낸 것이라 한다. 정정렬 춘향가 바디엔 엇모리가 둘이 있는데 끝맺음에 나오는 엇모리는 옛부터 내려온 소리라 한다. {어질더질}이라는 말은 이러고 저러고 놀아보자라는 뜻이라 한다.
옛 명창들은 염불장단-엇모리로 단가를 많이 불렀다 한다. 예전엔 심청가 중 <화초타령>을 엇모리로 했다 한다. <<화초도 많고 많다∼>> 하는 사설은 강태홍이 작사한 것이라 한다.(계속)

2002년2월7일

2004-07-10
 

Powered by GodoTech
Copyright (C) 2000 국악음반박물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