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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음반학 제11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2001년) 논문집에 실린 노재명의 {20세기 한국전통불교음악 음반 총목록과 인간문화재 증언자료} 중에서 발췌한 것임.
영산재 인간문화재 박송암 증언<1>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박송암(朴松庵, 본명:朴喜德) 스님은 1911년 10월 14일(음력)에 부친 박운허(朴雲虛, 본명:朴春緖) 스님과 모친 김성녀 사이의 슬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서울 봉원사에서 부모가 살았지만 절안에서 낳을 수가 없어 서울 마포구 대흥동 의원으로 가서 이 박희덕을 낳았다 한다. 박송암 스님의 아랫 동생 박혜륜 스님은 8세 연하라고 한다.
박송암 스님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개화파의 박영효라 한다. 박송암 스님은 이 할아버지에 대한 기구한 사연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박송암 스님은 송암 이전에 얻은 첫 법호가 {기환}(基煥)이었다고 한다. 한편 박송암 스님의 부친 박운허가 스님이 되고 나서 얻은 첫 이름은 {흥원}(興元)이었고 이분은 예전에 도량장음 다 했고 과일, 떡, 나물 등 제물상 차림을 도맡아 했다 한다. 그리고 범패승 이보담 스님이 {운허}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당시 봉원사에서 범패는 이보담 스님 등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박운허 스님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열반하였다고 한다.
박송암 스님은 14세 때 봉원사 내에서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발을 해주고 번 돈으로 월사금을 내며 연희보명학교 등에 다녔고 송본양복점에서 근무한 바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박송암 스님은 19세 때 승려가 되기 위해 삭발을 했고 그로부터 2년간 이월하 스님한테만 범패를 사사했고 남벽해 스님한테는 배운 바 없다고 한다.
박송암 스님은 일제 때 2년간 청춘극장의 전신인 예원좌 좌장 김춘광의 누나 김정숙이 청춘극장에서 사극 공연을 할 때 출연하여 회심곡 등을 불렀다고 한다. 김정숙은 박송암 스님의 수양모라고 한다.
박송암 스님의 부인은 11세 연하인 정진임이고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남 박영대가 현재 봉원사에 {고산} 스님으로 몸 담고 있는데 이 고산 스님은 19세부터 부친인 박송암 스님한테 범패를 배운 무형문화재 영산재 이수자라 한다. 그외 고산 스님의 다른 형제 2남 1녀는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한다.
박송암 스님은 1973년 11월 5일 인간문화재가 되었고 그 직전인 1973년 10월 7일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회심곡, 홋소리가 담긴 {불교음악 범성} 음반(JLS-120483, 1LP)을 낸 바 있는데 이는 왕십리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라 한다. 이 음반에서 북반주를 담당한 이는 이충선이라 하며 박송암 스님과 민속악사 이충선은 의형제간으로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한다. 이충선과 그렇게 가까워진 것은 함께 인간문화재로서 공연을 같이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박송암 스님은 1970년대 후반에 판문점 근처 통일사에 있던 윤일선 스님의 부탁을 받고 서울 한강스튜디오에서 범패 장시간음반(LP)을 여러장 취입한 바 있다고 한다. 또 박송암 스님은 79세 때 9일간 불교방송국에서 범패를 녹음한 바 있다 한다.
박송암 스님은 호적 잘 불던 이로 임원식과 박기동을 꼽았으며 민속악사 지영희는 잘 모르고 가야금 명인 성금연은 잘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틈틈히 국립국악원에 들려서 김천흥, 성경린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울려 논다고 하였다.
1960∼70년대 영산재에서 삼현육각 등의 민속악사로는 임원식, 박기동을 비롯해서 김광식(대금 피리), 이충선(피리 대금 장고), 신충근(대금 해금), 이정업(해금 대금 장고)과 그의 부친 이태평(장고 피리 해금) 같은 이들이 많이 연주하였다 한다. 이 가운데 김광식은 이태평과 사촌간이라 한다.(계속)
2001년11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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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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