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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2001년 국악음반박물관/지구레코드에서 제작된 {판소리 3명창(최승희,성우향,박송희) 특별공연 실황} 음반(JCDS-0747, 1CD)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판소리 명창 박송희 증언<2>
증언 일시/1995.8.31.15:00∼15:30, 1997.6.9.13:00∼15:00, 1998.7.7.14:30∼18:00, 1998.7.22.14:00∼18:00, 1998.7.27.17:50∼19:30, 1998.8.27.13:45∼15:00, 1999.3.22.20:00∼22:00, 2000.6.1.14:00∼19:00, 2000.6.2.16:30∼17:00, 2001.1.15.10:00∼10:20, 2001.1.17.13:20∼14:30.
증언 장소/서울 박송희 판소리 전수소와 그 근처 식당, 전화 통화, 한국방송공사(KBS) 본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
대담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나는 17∼18세 무렵부터 1년간 동일창극단에서 조상선 선생님한테 단가 <적벽부>, <여객같은>(조상선 작곡), 판소리 춘향가 중 <술상 차려>, {팔도강산민요} 연곡(조상선 작곡) <추석놀이>, <달맞이가세>, <사절가>, <널뛰기>, <단오놀이>, {흥보전}, {추풍감별곡}(조상선 작곡), {남강풍월}(조상선 작곡)과 같은 창극의 토막소리를 배웠다. 창극 {흥보전}에서는 임소향씨가 흥보를, 박초월씨가 흥보처를, 조상선 선생님이 놀보를 맡았고 {추풍감별곡}에서는 박초월씨가 주연을 맡아 <추풍감별곡>을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 박초월 선생님의 <추풍감별곡>을 들으려고 극장 앞에 구름떼 같이 모여서 줄을 길게 늘어섰다. {남강풍월}은 동학란 이야기로 꾸며져 있었다.
일제 말기에 동일창극단에서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가사를 일본말로 만들어서, 2차대전 찬양 내용을 삽입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동일창극단에서는 흥보네 자식과 그 이웃 젊은이들이 다 장성하여 2차대전 전쟁터에 싸우러 나간다고 하는 내용으로 각색해서 창극 {흥보전}을 공연했는데 일본이 그렇게 시켰고 그리 안하면 혼났다. 동일창극단에서 창극 {흥보전}을 공연할 때 추석은 돌아오고 다른 집에서는 떡 치고 흥보네 식구는 굶고 있는 장면에 <추석놀이> 노래를 삽입해서 불렀는데 이 노래를 매조지(끝맺음)할 때 2차대전 군사로 나간 자식들에게 그 부모들이 떡 하고 맛난 것을 많이 보낸다는 사설을 넣어 불렀다.
예전에는 선생들이 젊은이에겐 단가 <백발가>를 잘 안가르쳐 줬고 이런 분위기 탓에 나는 조상선 선생님한테 <백발가>를 못배웠다. 하지만 조상선 선생님이 <백발가>(젊어 청춘)를 부르는 것과 오태석씨가 가야금병창으로 <백발가>(젊어 청춘)를 부르는 것은 목격한 바 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단가를 길게 부르지 않고 간결하게 불렀다. 또 단가를 부르다가 때에 따라서는 다 부르지 않고 중간에 끊고 <<아니 놀고 무엇을 헐끄나>> 하고 맺기도 했다.
조상선 선생님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서 정정렬씨 문하에서 소리를 많이 배웠으며 작곡과 연극에 재능이 있었고 키가 컸지만 소고놀음을 기가 막히게 추었다. 조상선 선생님은 소리 공부가 지겨워 정정렬씨 문하에서 도망가 영화를 보다 정정렬씨에게 들켜 맞기도 많이 맞았다. 조상선 선생님의 목성음은 철성이다. 조상선 선생님은 장영찬씨를 아들같이 아끼고 소리를 성의껏 많이 가르쳐 주었다.
동일창극단에는 조상선, 임소향 부부를 비롯해서 백점봉, 임방울, 오태석, 공기남, 강남중, 정광수, 최막동, 임준옥, 박초월, 박귀희, 조순애, 한애순, 조봉례, 오옥석, 한일섭 씨 등이 있었다. 백점봉씨는 당시 나이가 40대를 넘겼고 단가를 잘 불렀다. 나는 임방울 선생님이 부르는 단가 <호남가>와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듣고서 그 소리를 땄고 후에 임방울 선생님에게 그 소리를 점검받았다. 임방울 선생님은 아구성을 잘 썼는데 나는 그 소리가 기가막히게 좋았다. 공기남씨는 공창식씨의 아들로서 당시 20대 이상 되는 나이였다. 방진관씨는 보지 못했다. 동일창극단은 만주 공연도 했으나 이때는 난 참가하지 않았다. 동일창극단이 신의주에 있을 때 조국이 광복되었다.
나는 18세 무렵에 김연수씨가 이끌던 협률사에 들어갔다. 이때 나는 창극 {흥보전} 공연시 흥보처 역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연수씨가 나에게 제자로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나는 지금 생각하면 잘하는 소리인데 그땐 왠지 김연수씨의 소리가 너무 싫어서 거부하고 전혀 배우질 않았다.
나는 19세 때 송영식씨가 신작판소리 <열사가>를 공연할 때 같이 다녔는데 나는 이때 앞소리를 하고 승무를 추었다. 송영식씨는 고흥 사람, 양반 광대로서 이동백제로 소리를 했으며 지금 살았으면 100살이 넘었다. 그런데 이때 광주경찰청장이 승용차를 타고 구경을 왔는데 그때 그 차를 운전한 달성 서씨(서정갑:순천 사람)가 나를 보고 반해서 그후 1년간 서로 사귀다가 20세 무렵에 혼인하였다.
나는 혼인 후 얼마간 잠시 가정생활을 하다가 상경하여 박귀희, 김소희 선생님이 이끄는 여성국악동호회(흥행사장:김주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 단체에서는 {햇님 달님}이라는 창극 공연으로 세인의 큰 관심을 끌었는데 당시 햇님은 박귀희 선생님, 달님은 김소희 선생님이 맡았다. 나는 이 여성국악동호회에서 틈틈히 박록주 선생님에게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김경애씨가 이끄는 햇님국극단에 참가하여 서울, 부산, 마산, 진주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이 단체에서는 박동진, 정철호 씨가 작곡을 했다. 이 단체는 창극의 전성기를 맞아 흥행이 잘 되었는데 김경애씨가 이원경씨를 만나 혼인하면서 이 단체는 해체되고 그후 새한이라는 단체가 또 생겨났으나 이때는 이미 창극이 쇠퇴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5∼6년 뒤에 이 단체도 해산되었다. 나는 여성국악동호회부터 새한 시절까지 약 10여년 동안 이 창극 단체 생활을 하였다.
나는 1960년 무렵 창극 단체들이 대부분 해산되자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렇게 수 년간 지내다가 막내아들이 8개월쯤 될 때 서울에 올라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는 그 당시 서울로 온 직후부터 2년간 김소희 선생님 문하에서 춘향가 중 <기산영수>∼<이별가>와 심청가 중 <아버지 듣조시요>∼<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를 배웠다.
그후 나는 박록주 선생님을 찾아가서 흥보가를 배웠다. 그로부터 2년 뒤 박록주 선생님이 중요무형문화재 춘향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 나는 그분의 전수생이 되어 춘향가를 배웠다. 또 나중에 박록주 선생님이 흥보가 인간문화재로 지정 종목이 바뀌고 나서는 난 박록주 선생님이 타계할 때까지 흥보가를 집중적으로 사사했다.
이때 나는 한농선씨와 함께 박록주 선생님에게 흥보가를 배웠으며 나는 이때 박록주 선생님에게 단가 <백발가>, <만고강산>, <운담풍경>, <편시춘>, 숙영낭자전도 틈틈히 익혔고 이 당시 조상현씨도 박록주 선생님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다. 나는 박록주 선생님 문하에서 적벽가, 심청가, 수궁가는 배우지 않았다.
여러 명창들이 숙영낭자전을 소리로 짰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나는 내가 배운 숙영낭자전에 아니리가 없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리를 짜려고 소설 숙영낭자전을 보았는데 판소리 숙영낭자전과 사설이 매우 달랐다. 그리고 박동진씨가 짠 숙영낭자전은 박록주 선생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박록주 선생님이 장판개제 흥보가 중 <놀보 박타령>을 흥얼거리는 것을 듣고 익혀서 나름대로 다듬어 나중에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 뒤에 이어서 내 나름의 완창 흥보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내가 나중에 정순임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정순임 어머니 장월중선씨가 생전에 장판개제 흥보가 중 <놀보 박타령>을 불렀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나는 김연수씨의 <놀보 박타령> 창본에 기록되어 있는 사설을 보고 옛 소리식으로 작곡을 하여 박록주 선생님한테 배운 흥보가에다 붙여서 부르고 있다.
박록주 선생님은 생전에 <놀보 제비노정기>(안남산)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놀보 제비노정기>를 박록주 선생님한테 배워서 <놀보 박타령> 앞에 삽입시켜 부르고 있다.(지구레코드 JCDS-0674-1∼3, 3CD / 1991년 녹음 / 고수 김청만)
나는 박록주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석에 누워있는 박록주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박록주 선생님이 평소에 지은 <인생백년>이라는 글을 가족이 대신 종이에 적어 놓았었는데 내가 문병간 자리에서 그 글이 적힌 종이를 받았고 박록주 선생님 타계 후 내가 그 스승의 글에다가 박록주 선생님 스타일로 곡을 붙여 <인생백년>이라는 단가를 지어 불렀다. 박록주 선생님은 <<소리를 만들지 말아라. 만든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소리에는 음양이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1960년대에 박록주 선생님이 박봉술 선생님에게 박송희한테 적벽가 좀 가르쳐 주라고 해서 나는 박봉술 선생님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나는 박봉술 선생님에게 수궁가 중 <용왕 탄식>∼<도사 등장> 등을 배웠다.(계속)
2001년5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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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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