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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판소리 명인 함동정월<2>
* 이 글은 1996년 국악기록보존연구소(명인기획)/엘지미디어(LG소프트)에 의해 복각 제작된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9)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음반(LGM-AK009, 1CD)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가야금,판소리 명인 함동정월<2>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993년에 신나라레코드에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 보관되어 있는 함동정월의 유성기 원반 가운데 <편시춘>과 <갈까보다>(상사가) 녹음을 불법으로 복사하여 {가야금병창 명창들(2)} 음반(신나라 SYNCD-055, 1CD)에 복각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함동정월의 유성기음반만 모아서 독집 음반으로 복각하기는 이번에 엘지미디어가 제작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음반(LGM-AK009, 1CD)이 처음이다.
유성기음반에 취입된 함동정월의 가야금산조는 만년 연주보다 속도가 빠르고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의 경우에는 당시 국악인들에 비해서 모두 느리게 불렀다. 당시 국악인들은 요즘보다 음악을 빠르게 부르고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함동정월의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요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속도로 불렀다. 가야금산조는 굿거리와 느린 자진모리 장단을 녹음했고 판소리, 가야금병창, 남도민요는 진양조나 중모리로 된 느린 곡만 녹음했다.
함동정월은 목포 사람 박준규를 만나 19세 때 첫 애를 낳았고 21세까지 목포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서울 조선권번에서 잠시 활동했다. 이 때 서울 갑부 정모(某)의 다섯번째 소실로 들어가서 22세부터 27세까지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고 27세 때 온양으로 이사하여 6.25 때까지 살았다. 함동정월이 최악의 인연으로 여긴 김수정은 이 때 정모의 네번째 소실이었다. 김수정(金水晶)은 가곡의 대가인 하규일(河圭一) 문하에서 가곡을 배웠고 일찌기 가곡, 춤으로 이름을 날려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스승인 하규일과 함께 <연락곡>, <화편>, <평조회상>과 같은 정가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함동정월은 6.25 때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둘 다 일찍 죽었고 6.25 전쟁을 겪은 후 38세 때 대전으로 이사하여 막내 아들을 낳았다. 대전에서는 국악원을 차려 원장을 하면서 이때부터 정모와 함께 산 후로 놓았던 가야금을 다시 시작했고 나성엽과 김초향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41세 때 정모와 헤어지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 때 함동정월은 정악원에서 시조를 배웠고 박초월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다. 그리고 53세부터 57세까지 명고수 김명환과 함께 살면서 음악 교류를 가졌다.
함동정월은 1970년대 초반부터 작고할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함 명인의 막내 아들 정보환을 비롯해서 김해숙, 이경자, 김일륜, 윤미용, 나현숙, 성애순, 김정자, 이재숙, 황병기, 황병주, 이영희, 박재희, 정회천, 김상순, 신영균 등이 함동정월 문하에서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함동정월은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가 뛰어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뒤늦게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공연, 방송 등에 별로 나서지 않고 묻혀 지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함동정월은 1936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후 50여년 동안 음반을 취입하지 않았고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1980년 이후에 다음과 같은 음반을 냈다.(노재명, 가야금산조 음반에 대하여{韓國音盤學 제4호} 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4, 451∼489쪽)

1984년 現代音盤株式會社 HSJ민28(1MC)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1985년 국악보급진흥회-한국의 전통음악
(38MC 중 9번 테입)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1989년 뿌리깊은나무-산조 전집(SEL-RO137, 9LP 중 2번 음반)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1995년에 킹레코드 CDD-002, 1CD로 재발매됨)
1994년 킹레코드 SYNCD-062(1CD)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이밖에 다음과 같이 음반으로 제작되지 않은 릴 테입 녹음이 여러 벌 남아있다.

1970년대 초반 가정집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북:김명환, 소장:한영서)
1981년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장고:김동준, 소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4년 제15회 인간문화재대전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장고:김동준, 소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0년대 후반 가정집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장고:정철호, 소장:심우성)

함동정월은 젊은 시절 겪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만년에 심한 피해 의식에 시달렸다. 남자들로 부터 버림 받고 극심한 경제고에 시달려야 했고 1977년 막내 아들의 자살, 1979년 교통사고, 1989년에는 [춤추는 가얏고]라는 소설과 드라마로 인해 더욱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만년에는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고 동네 사람들로 부터 욕쟁이 할머니, 심지어 미친 할머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필자도 1989년 겨울 함 명인을 만나러 갔다가 동네 아주머니들로 부터 그런 욕설을 들었고 함 명인의 며느리로 부터 만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문전에서 발 길을 돌려야 했다.
1994년 10월 12일 함동정월은 서울 면목동에서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변변한 독주회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형편이 나아지면 고아원을 만들고 싶다던 그는 인간문화재 보유증서를 걸어 놓은 셋방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다. 우리나라 초기 인간문화재들의 만년 모습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그랬다.
함동정월은 오늘날 가야금산조 명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악기와 민요, 정가, 무용을 두루 잘했다 한다.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그의 다양한 음악들을 들어보면 생전에 그가 한 말대로 그가 가야금산조뿐 아니라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에도 많은 애착을 가지고 공들여 수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만년에 추억에 잠겨서 예전에 내가 이런 소리도 잘했었지 하고 자랑 삼아 얘기했던 <범피중류>, <갈까보다>, <육자배기> 등이 이 콤팩트디스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음반은 함동정월의 초기 모습과 그의 폭넓은 예술적 역량을 실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끝)

2001년4월10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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