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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순애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2, 1CD, 고수:장송학, 음반 해설 및 사설 채록:이보형 노재명, 1998년 녹음, 1999년 지구레코드 제조)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판소리 고수 장송학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장송학 명인은 1924년 10월 5일(음력, 호적:1926.11.20) 경상도 안동에서 아버지 장순환과 어머니 강소조 사이의 2남 5녀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고 아주 어려서 전라도로 이사하여 그 지역에서 성장하였다.
장송학의 부모는 모두 대구 사람으로서 국악인은 아니라 한다. 장송학의 나이 9세 때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부친은 형제가 없었다 한다. 장송학의 모친은 부친보다 8세 연하였고 장송학의 나이 44세 때 모친이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장송학은 위로 언니 네명과 오빠가 한명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있는데 형제 중에 국악을 한 사람은 없으며 장송학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후손들 역시 국악은 안한다고 한다.
장송학은 13세부터 4∼5년간 이리에서 정자선에게 호남 검무, 승무, 남무, 한량무 등의 무용을 비롯해서 가곡과 시조, 양금 풍류 48장을 배웠다. 이 가운데 지금은 거의 전승이 끊어진 호남 검무에 대해 장송학은 상당 부분 기억하고 있다. 전라도 검무는 칼 돌리는 법과 칼 크기, 춤사위 등이 요즘 볼 수 있는 다른 지방의 검무와 많이 다르며 의상은 거의 같다고 한다. 특히 검무 중 <사방돌이>를 할 때 다른 지역의 검무에선 그걸 안하거나 서서만 하는데 호남 검무에선 댕기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뒤로 재쳐서 춘다고 한다. 그리고 전라도 검무에서는 반드시 칼을 안에서 바깥쪽으로 돌리고 칼이 어깨 밑 바깥쪽에 착착 소리가 나도록 장단에 맞춰 돌려야 하는데 4박 중 끝박에서 칼 닿는 소리가 나야 한다고 한다.
장송학이 배운 남무는 요즘 추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남녀 각 1명씩 쌍을 이루어 추는 것으로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하는 무용이라 한다. 그리고 요즘 호남 살풀이춤을 보면 3자 반짜리 직사각형 모양의 명주 수건을 들고 추는데 예전에는 1자짜리 정사각형 모양의 비단 수건을 들고 추었다 한다.
장송학의 본명은 장순난이며 송학이라는 예명은 상기와 같이 이리에서 춤, 정가, 풍류를 가르쳐준 정자선이 지어준 것이라 한다. 이당 김은호 화백은 그 예명이 외로운 이름이라며 바꾸라 했으나 장송학은 스승이 지어준 것이라 안바꾸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한다.
장송학이 10대 중반일 때 정자선은 60대 중반의 나이였고 장송학이 정자선 문하에서 국악을 익힐 때 진채옥, 김금화, 이앵무, 박농월 등과 함께 배웠는데 이들 모두 장송학과 비슷한 연령이라 한다. 진채옥은 전북 익산서 조금 떨어진 대장촌이 고향이며 소리를 잘했고 장송학과 친했으며 장송학은 진채옥을 이리에서 몇년 전에 보고 못봤는데 현재 생존해 있다고 한다. 김금화는 전주 사람으로서 장송학보다 1∼2세 연하인데 20대 때 요절했다고 한다. 이앵무는 담양 사람이고 박농월은 이리 사람인데 모두 작고했다고 한다.
장송학은 17세 때 이리에서 수년간 이기권한테 단가 <적벽부>, <호남가>, <편시춘>, <강상풍월>,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와 <이별가>, 심청가 중 <범피중류>∼<모녀 상봉>,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수궁가 중 <용왕 탄식>과 <약성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배웠다. 이기권은 김제 사람으로서 당시 50∼55세 정도였다 한다. 이때 장송학은 강종철, 홍정택, 김유앵, 진채옥, 김금화, 이앵무, 박농월 등과 함께 이기권에게 소리를 배웠다 한다. 이 가운데 김유앵은 현재 전주에서 명창 홍정택과 함께 살고 있다 한다.
장송학은 20세 무렵에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수년간 단체 생활을 했다 한다. 이때 장송학은 이 창극단에서 20세 무렵부터 약 3년간 김원길 문하에서 소리북을 배웠다 한다. 김원길은 전남 사람으로서 당시 37∼40세 가량 됐으며 명고수였고 소리도 잘했다 한다. 그리고 장송학은 이 당시 20∼21세 무렵에 7∼8개월 동안 김소희 문하에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이별가>를 배웠다 한다.
장송학은 23세 무렵에 판소리를 작파하고 고수로 돌아섰는데 그가 공식무대에서 판소리 반주를 처음 한 것은 김제에서 열린 신영채의 판소리 공연 때였다 한다. 신영채는 당시 50대였는데 큰 명창이었다 한다.
장송학은 자기 소리가 자신한테 앵기지 않아서 소리를 그만뒀다 한다. 판소리는 자신이 들었을 때 귀에 싹 들어와야지 앵기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 장송학은 고수로 돌아선 뒤에는 예전에 배운 판소리뿐 아니라 민요 <흥타령>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한다.
장송학은 23세 무렵 혼인하여 서울서 약 15년간 가정 살림에 전념하였고 그 뒤 30대 후반부터는 판소리 고수로서 국악 활동을 쉬지 않고 해왔다 한다. 그가 지금까지 장단을 맞춘 판소리 명창으로는 앞서 언급한 신영채를 비롯해서 임방울, 박록주, 김연수, 정광수, 박봉술, 정권진, 박초월, 김소희, 한승호, 박귀희, 조순애, 성우향, 안향련, 한농선, 오정숙, 박동진 등이 있다 한다. 장송학은 박록주를 수양어머니로 모시면서 10여년간 박록주 학원에서 여러 명창들의 판소리 연습시 반주를 많이 했다 한다.
장송학은 현재 서울에서 살면서 공연 활동 및 후학 양성에 여념이 없는데 지방에서 제자들이 서울로 올라와 장소를 정해 놓으면 거기로 가서 판소리 고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장송학은 현재 제자들에게 진양조(24박)부터 중모리, 느린 중중모리, 자진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당악 순서로 장단을 가르친다고 한다.
장송학의 스승 김원길은 북반주를 할 때 왼손을 약간 벌려서 궁편을 치라고 했으며 장송학 역시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다. 그리고 장송학이 김원길한테 배운 바에 의하면 북채는 땅과 평행하게 하여 이동하면서 쳐야 하며 고수의 발은 절대 관중에게 보이면 안되고 왼쪽 무릎은 궁편에 닿게끔 하여 앉아야 하며 앉은 자세가 반듯해야 한다고 한다.
장송학은 판소리계에서 매우 드문 여류 고수로 활동하면서 설움과 시련이 많았다 한다. 남자 분장을 하고 나가서 반주를 하라는 제의도 많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여류 고수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장송학은 오직 고수로만 50여년간 외길을 걸어왔기에 현존 전문 고수 중에는 판소리 북반주에 대한 경험과 연륜이 가장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문화재가 못되고 있지만 최초의 여류 전문 고수라는 것과 그걸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해왔다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지금 고수로 활동하는 장덕화가 어려서 장송학에게 장단을 배운 바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송학의 나이 40대 후반에 판소리 명창 김강남월의 작고 소식을 들은 바 있다고 하며 장송학은 예전 자신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거의 다 없어지고 지금은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고 한다.(1998.7.22.14:00∼21:00 / 7.23.22:10∼22:20 / 7.24.10:00∼10:20 / 7.26.15:00∼16:30. 장송학 증언)
본 음반은 조순애 명인의 소리와 더불어 장송학 명인의 판소리 고법, 장고 가락을 영구 보존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값진 기록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01년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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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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