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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순애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2, 1CD, 고수:장송학, 음반 해설 및 사설 채록:이보형 노재명, 1998년 녹음, 1999년 지구레코드 제조)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판소리 명창 조순애<2>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조순애는 30대 중반에 박초월과 일본 공연을 가기 전에 박초월 학원에서 장홍심한테 검무를 배웠는데 지금은 그 춤을 대부분 잊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순애는 장홍심 문하에서 검무를 배우기에 앞서 30대 초반에 1∼3달 가량 서울 김취란 자택에서 그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배웠다 한다. 그때 익힌 산조 가락은 성금연류와 같았는데 지금은 연주를 거의 하지 못하며 당시 병창은 안배웠다 한다. 김취란은 명고수이자 줄타기의 명수였던 이정업의 부인으로서 경상도 사투리를 썼고 조순애보다 7∼8세 연상이었으며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한다.
조순애는 박초월 문하에서 나와 2∼3년간 집에서 쉬다가 명창 박록주를 찾아가 2∼3년 동안 단가 <백발가>와 <편시춘>, 판소리 흥보가와 숙영낭자전 전판을 사사했다. 이러는 와중에 김여란이 박록주에게 조순애를 자신의 후계자로 달라고 청하여 조순애는 김여란 문하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하여 조순애는 김여란한테 몇달 동안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부터 <신연맞이>까지 익혔고 단가는 안배웠다 한다.
조순애는 여러 스승한테 배운 판소리들 가운데 자신의 성대로 봐서는 김여란과 박초월의 소리제가 맞지만 마음은 박록주제에 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그냥 듣기엔 김여란제가 가장 좋았다 한다. 박록주는 소리를 바쁘게 하는 편이며 여자지만 남자소리를 하는 명창이었고 김여란은 아주 느리게 부르는 편이었고 그래서 배우기가 어려웠다 한다. 박초월은 청이 무척 높았는데 1950∼60년대에는 다들 청이 대체로 높았다 한다. 조순애는 그땐 김여란의 소리가 너무나 익히기 어려워 배우다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까운 소리를 놓쳐 버렸다 싶어 후회가 된다고 한다.
조순애는 30대 때 며칠간 한갑득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거문고산조 진양조를, 서용석한테는 아쟁산조 진양조를 잠깐 배웠는데 두 산조 모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음이 잘 나오지 않아 성이 안차 중도에 작파했다 한다.
조순애는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 그러니까 당시 나이 40세 무렵에 명고수 김동준과 혼인하면서 국악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물론 가정 살림하는 중간중간에 공연, 음반 취입 등을 조금씩 하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음악 활동을 거의 중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순애의 남편 김동준은 1925년 전남 화순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박동실, 박봉술, 김연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소리뿐 아니라 북, 장고, 가야금으로도 명인이었고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로 활동하다 1990년 작고하였다. 김동준은 가야금 명인 유대봉과 자주 어울려 서로 우스게 재담을 잘했다 한다. 김동준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현재 나이 40대 중∼후반 된 장녀 김영화만 국악을 했는데 김윤덕한테 가야금을 배웠으나 지금은 작파하고 일본에서 가정 살림을 하고 있다 한다.
김동준의 첫째 동생 김동섭은 현재 63∼64세 가량 되었는데 국악은 하지 않았다. 둘째 동생 김동식(김동진)은 한주환과 강백천 문하에서 대금산조를 배웠는데 대금을 반대 방향으로 불어서 사람들이 인정을 잘 안해줬으나 대단한 명인이었으며 형 김동준보다 1년 앞서 작고했다. 셋째 동생 김동표는 강백천한테 대금산조를 배워 그 음악으로서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으며 1999년에 환갑이 된다. 막내 여동생 김향옥(본명:김수련)은 1945년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오빠 김동준에게 단가, 판소리,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여러 여성국극단에서 공연 활동을 했으며 김오채 등에게 설장고, 꽹과리 등을 사사했다. 김동표와 김향옥은 현재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순애는 1950년대 후반(30세 전후)에 김효순, 한농선과 함께 신세기레코드에서 남도민요 <칠석놀이> 유성기음반(Sinseki N213∼214, 1SP)에 자신의 첫 녹음을 남겼다. 당시 <칠석놀이> 외에도 다른 소리가 더 취입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조순애, 김효순, 한농선이 이때의 음반 취입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바가 거의 없고 이 녹음 외에 이들이 함께 남긴 것은 더 발견된 자료가 아직 없는 상태다. 다만 이때 김효순이 독창으로 취입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어사와 장모> 유성기음반(Sinseki N227∼230, 2SP, 고수:미상)은 자주 발견되는 편이다.
1967년 무렵 조순애는 스승인 박초월 등과 함께 대도레코드에서 입체창 춘향전 중 <농부가>를 취입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조순애는 입체창 흥보전(대도레코드 TLM-714:이 음반표지 기록은 오류인 듯함, 12인치 3LP)에서 전반부 흥보 역을, 입체창 수궁가(대도레코드 TLM-723∼725, 12인치 3LP)에서는 용왕 역을 맡아 취입했다. 이때 전반부 흥보 부인 역은 성우춘, 후반부(둘째 박타령∼끝) 흥보 역은 김선초, 후반부 흥보 부인 역과 토끼 역은 김춘시, 나머지 배역은 박동순, 양옥진 등이 맡았으며 대금 연주는 박초월의 조카 서용석이 했고 북 반주자(또는 아쟁 연주자:불분명함)로 정철호가 참가했다 한다. 그리고 이 당시 취입된 <농부가>는 입체창 흥보전과 수궁가의 녹음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서 취입한 것인데 박초월, 성우향, 한농선, 박봉선, 김옥주가 이에 앞서 1960년 무렵 취입한 창극 춘향전 음반(대도레코드 TLM-713∼717, 10인치 5LP)의 녹음에 함께 덧붙여져서 1968년 4월 음반화 되었다.(대도레코드 STLM-708∼712, 12인치 5LP) 대도레코드에서 나온 이 입체창 음반들은 모두 박초월과 그의 제자들이 소리를 한 것이다.
이 가운데 김춘시는 김원술의 딸로서 현재 50대 중∼후반이고 박동순은 박초월의 조카로서 조순애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는 정도의 나이 차이였다 한다. 양옥진은 조순애와 같은 나이 정도였으며 작고했다고 한다. 김옥주는 전주 사람으로서 조순애와 박동순의 중간 나이 정도 되는데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한다.
조순애는 1973년 5월 23일 제3회 판소리 유파 발표회에 참가하여 소리를 한 바 있다. 이때 초기 판소리 인간문화재와 그 제자들이 함께 판소리 공연을 했는데 그 가운데 이선옥은 박초월의 제자로서 조순애보다 5∼6세 연하인데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김소희의 동생 김경희는 1990년 무렵에 작고했다 한다.
1977년 조순애는 박송희, 성창순과 함께 대도레코드에서 남도민요 음반(대도레코드 DS-00-7231∼2, 12인치 2LP)을 취입했다. 여기에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 <보렴>,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새타령>, <방아타령>, <강강수월래>, <농부가>, <남원산성>, <휘여능청>, <널뛰기>, <달맞이>, <까투리타령>, <구음살풀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음반의 뒷표지에는 반주자가 김동준(장고 꽹과리), 서용석(대금 새납), 윤윤석(아쟁 가야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순애와 박송희의 기억에 의하면 실제는 장덕화(장고), 이생강(대금 새납), 윤윤석(아쟁 가야금)이 반주했으며 <농부가>에서는 박송희가 소리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조순애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남도민요 음반은 이생강의 주선으로 왕십리에서 녹음한 것이라 한다.
1989년 조순애는 박송희, 신유경과 함께 뿌리깊은나무에서 남도민요 음반(12인치 1LP)을 냈다. 여기에서는 서용석(대금), 윤윤석(거문고), 장덕화(장고)가 반주를 했으며 장덕화의 주선으로 취입을 하게 됐다 한다. 이 민요 음반은 1994년 11월에 다시 콤팩트디스크로 제작된 바 있다.(뿌리깊은나무/신나라레코드 CDD-012, 1CD) 이 녹음집에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이 들어있다.
그리고 1997년 조순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김동표의 음반(국립문화재연구소 NCPR-9602, 1CD, 비매품)을 제작할 때 구음과 장고 반주를 녹음한 바 있다. 조순애는 뿌리깊은나무에서 발표한 민요 녹음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낸 구음 녹음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상기 음반들과 본 음반에 취입된 것 외에 조순애는 1998년 4월 MBC-AM 좋은아침 우리가락에 출연하여 단가 <여객같은>과 <적벽부>, 판소리 흥보가 중 <떴다 보아라>, 창극 논개전 중 <소향이가 논개에게 죽지 말라고 만류하는 데>, 구음,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을 기록 보존용으로 남긴 바 있다. 이 가운데 흥보가 중 <떴다 보아라>(박록주제) 녹음은 조순애가 현재 부를 수 있는 소리 중 음반화 되지 않은 것이기에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그리고 1998년 8월 19일 조순애가 자택에서 조상선 작곡의 국극 선화공주 중 <헛소문이든 아닌 소문이든>(중모리 무반주)을 부르는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현재 국악기록보존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디지털 6mm 비디오테입 소장 관리번호:MI6V-0230) <헛소문이든 아닌 소문이든>은 서동에게만 시집가려고 하는 선화공주를 왕비가 서풍과 혼인시키려 하니 공주가 안가겠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 외에 조순애는 여러 국악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고 여러 국악 공연에 특별 출연하여 남도민요 등의 녹음을 수차례 남겼다.
조순애는 이처럼 여러 음반을 비롯해서 방송 및 현장 녹음과 영상을 남겼으나 여지껏 독집 음반은 단 한장도 낸 적이 없었다. 그런 차에 이렇게 본 음반 제작이 성사되어 70세에 비로소 이렇게 자신의 첫 독집 음반을 내게 된 것이다.
조순애는 현존 남도명창 가운데 독집 음반을 안남긴 이로는 박보아의 소리가 꼭 녹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몇차례 강조를 하였고 조금앵이 언니인 조농옥의 판소리 춘향가를 녹음해둔 것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1995.5.21.15:00∼15:20 / 1998.7.7.14:30∼18:00 / 7.21.21:40∼21:55 / 7.22.14:00∼21:00 / 8.19.14:00∼18:30 / 8.27.13:45∼15:00. 조순애 증언)
조순애는 본 음반 취입시 녹음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목이 좋아졌다. 그리고 본 음반은 거의 모든 곡이 단 한번에 취입되었다. 수록곡 가운데 단가 <적벽부>와 <여객같은>은 지구스튜디오 측에서 녹음상태 조절에 따른 요구에 의해 두번 취입하였고 판소리 수궁가 중 <여봐라 주부야>∼<별주부 부인 만류>는 조순애가 부른지 오래된데다 사설이 길어 후반부만 한차례 수정 녹음하였다. 남도민요 연곡은 녹음내용이 길어서 두번에 걸쳐 나누어 불렀는데 <자진 육자배기> 부분에서 한차례 쉬었다가 이어서 녹음하였다.
본 음반에 고수로 참가한 장송학은 녹음을 마친 직후 조순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천구성을 타고 났다. 70세를 넘기고, 더구나 오랫동안 활동을 안하다가 그만큼 소리할 사람이 없다. 어느 누구든 소리를 하면 대체로 흠이 다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흠을 잡을 데가 없다. 난 이 음반 취입을 시작할 때 무척 긴장이 됐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조순애에게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반주를 더 잘해주고 싶었고 그와 제대로 장단을 맞추어본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기에 부담이 컸다. 그런데 녹음에 들어가서 그가 소리를 너무나 잘하고 별다른 실수없이 무사히 취입이 끝나 이제 속이 무척 후련하다.]
조순애는 현재 서울 홍제4동에 살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조순애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사람은 본 음반의 민요 녹음시 조창자로 참여한 채수정뿐이다. 그리고 조순애는 김죽파가 생전에 가야금산조를 연주할 때 장고 반주를 자주 해주었고 그 산조 가락을 많이 들어봐서 현재 박현숙이 보내오는 가야금 제자 3∼4명에게 구음으로 그 가락들을 전해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화순 능주 일대를 유명한 국악의 고장으로 꽃피운 유능한 예술 집안 조씨 가문이 배출한 국악인들은 어느덧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사회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국악을 등지고 후손에게는 그 가업을 물려주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조순애 명인이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그간 덮어두었던 소리들을 꺼내어 최선을 다해 이렇게 음반에 남겨주었다. 본 음반은 그 찬란하고도 유서깊은 화순 능주 조씨 가문의 국악 발자취에 대한 여운을 길게 남기는 의미있는 기록물로서, 소중한 예술로서 우리에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끝)
2001년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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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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