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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2>
* 이 글은 1996년 엘지미디어(LG소프트)에서 제작된 {최순경 서도소리} 음반(LGM-AK012, 1CD) 해설서 1-5쪽에 실렸던 원고이다.

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2>

증언/이은관(배뱅이굿 인간문화재)
증언 일시 및 장소/1992.7.14.20:00∼20:20(전화 통화)
1996.1.27.17:30∼20:00
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이은관 서도소리 전수소)
대담 및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허덕선이라는 분은 오래 전에 이북에서 이름을 날린 전설적인 명창이다. 소리를 아주 잘했다고 하며 짓거리(지적, 웃음거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김관준 명창은 <배뱅이굿>, <안중근가>, <전쟁가>, <제전> 등을 지은 서도소리의 대명창이다. 만년에 박수 무당으로 살았다는 말이 있다. 김관준 명창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이며 그 아들 김종조 씨를 비롯해서 최순경 씨, 이인수 씨와 같은 명창을 길러냈다.
김종조 씨는 사람들이 이북 말씨로 흔히 ‘김종도’라 했다. 김종조 씨도 그 아버지 김관준 명창과 마찬가지로 아마 용강 출신일 것이다. 김종조 씨는 소리를 아주 잘했고 인기가 대단했다. 김종조 씨는 소리하는 사람으로는 드물게 중학교 정도까지 졸업한 학식있는 명창이었다. 김종조 씨는 만년에 길거리에서 소리를 팔았다 한다. 아편 때문에 만년에 패인이 되어 무척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중국을 통해 아편을 들여와서 남용하여 몸이 망가진 것 같다.
최순경 씨는 평남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이북에서 인기와 명성이 대단했다. 인기 면에서만 보면 최순경 씨가 김종조 씨의 명성을 능가했다.
나의 스승인 이인수 선생님은 나보다 20세 가량 연상으로서 1890년대 후반에 평남 용강에서 태어나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용강, 진남포, 황주 등지에서 활동하셨고 특히 진남포에서 오랫동안 사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인정이 많았고 성품이 무척 너그러웠다. 그 선생님의 부인은 기생 권번 출신이며 소리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인수 선생님은 얼굴이 약간 얽었으나 소리 실력 만큼은 당대 최고의 서도소리 명창으로 꼽힐 정도로 대단했다. 이인수 선생님의 특기는 <배뱅이굿>과 <병신 난봉가>였다. 그리고 개소리 흉내, 장고 돌리기, 꼽추춤 등의 짓거리를 잘하셨다. 내가 장기로 삼고 있는 짓거리들은 거의 모두 이인수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인수 선생님은 자손이 없어서 만년에 외로워 하셨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공연을 하여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주 한탄하셨다.
내가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울 당시는 1930년대 후반, 대동아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심한 경제고에 시달렸다. 그런데 당시 황주는 사람들이 대체로 잘 살았고 소문난 부자들이 많았다. 나는 당시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님을 모시고 부자집에 다니면서 함께 공연을 하곤 했다.
이인수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인 김종조 씨, 최순경 씨 같은 명창들은 여러 장의 유성기음반을 남겼다. 그런데 이인수 선생님은 단 한장의 음반도 남기지 못하고 작고하셨다. 나는 그 분의 제자로서 이 점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된다. 이인수 선생님도 음반을 취입하지 못한 것을 만년에 아쉬워 하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40대 후반(1940년대 중반)에 작고하셨다.
경기소리 명창 최정식 씨와 최경식 씨는 시조, 가사 등 정가에 능하였고 경기민요를 잘 불렀다. 두 명창 모두 나보다 15세 가량 연상(1902년 무렵 출생)이었고 광복 후까지 활동하였다.
서도소리 명창 김칠성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이며 황해도 출신이다. 김칠성 씨는 사리원, 개성권번 등에서 소리 선생을 했고 유성기음반을 여러 장 취입했으며 인천에서 작고하였다. 김칠성 씨는 약간 쉰 듯한 성음으로 소리하는 것이 특색이다.
서도소리 명창 양희철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황해도 사람이다. 양희철 씨는 해주에서 소리 선생을 했으며 나와 한 무대에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서도소리 명창 민칠성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사설 방아타령>을 잘 불렀다.
경서도소리 명창 신해중월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이다. 신해중월 씨의 남편은 국립국악원에 재직했던 거문고 풍류 명인 김상기 씨다.
경서도소리 명창 백모란 씨도 신해중월 씨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였는데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이었다.
내가 신해중월 씨와 백모란 씨를 처음 본 것은 내 나이 20대 초반에 한일관에서였다. 거기에는 두 분 외에도 비슷한 연배의 여류 명창이 한 분 더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그 때 나는 그 분들 앞에서 내 소리 솜씨를 선보인 기억이 난다.
서도소리 여류 명창 장학선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평양 사람이다. 장학선 씨는 <수심가>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고 일제 때 인기가 대단했다. 장학선 씨는 박수 무당과 함께 살았고 1972년 무렵에 왕십리에서 작고하였다.
서도소리와 신민요의 명창 김주호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평양 사람이다. 김주호 씨는 일제 때 <맹꽁이타령>을 크게 힛트시켜서 유명해졌다. 김주호 씨는 서울에서 인기가 대단했으나 이북에서는 알아주지 않았다. 김주호 씨는 서도소리를 정통으로 하는 이북의 대명창들한테는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이북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도소리를 하는 명창으로 알려진 김진명 씨는 나보다 3세 연상이다. 김진명 씨는 예전에 내가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 자주 본 적이 있다. 김진명 씨는 어떤 분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이인수 선생님에게 많이 찾아왔었다. 김진명 씨는 얼굴이 아주 잘 생겼고 소리를 잘하여 일제 때 기생들의 우상이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남북 통일 범민족음악회 때 김진명 씨가 서울에 왔는데 그 때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김진명 씨의 형은 현재 남한에 살고 있다. 남북 통일 범민족음악회 때 김진명 씨와 함께 와서 공연한 김관보 씨는 대중가요 작사가 조명암 씨의 부인이다.
서도소리 명창 한경심 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으며 평양 사람이다. 한경심 씨의 남편 또한 서도소리 명창이었다.
백운선 씨는 옛날 명창과 근래 명창, 동명이인으로 두 사람이 있다. 옛날 백운선 씨는 서도소리를 했던 명창이다. 근래 백운선 씨는 경기소리 명창인데 나보다 7,8세 연하(1924년 무렵 출생)로서 현재 살아있다.
박부용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경기민요와 <수심가>를 잘 불렀다. 박부용 씨는 신불출 작사, 문홍월 작곡의 <노들강변>으로 인기를 끌었다. 박부용 씨는 4,5년 전에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이정렬 씨와 이반도화 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이며 1960년대 후반까지도 활동한 서도소리 명창들이다.
193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에 유랑 극단에서 활동한 고준성 씨는 재담을 옛날식 민속조로 잘하였다. 고준성 씨는 나보다 6세 가량 연상(1911년 무렵 출생)으로서 경기도 양평 사람이며 1950년대 초반에 양평에서 작고하였다.
1940∼1945년 무렵, 약 5년 동안 나와 함께 신불출 씨의 극단에서 활동한 김계춘 씨는 황해도 백천 사람이다. 김계춘 씨는 나보다 몇 살 연상으로서 내가 누님이라고 불렀다. 김계춘 씨도 나와 마찬가지로 배뱅이굿이 특기였다. 나의 경우는 관중을 웃기는 해학적인 배뱅이굿이라면, 김계춘 씨의 경우에는 나와 대조적으로 구슬프게 소리를 하여 관중을 울리는 배뱅이굿이었다. 김계춘 씨는 김백소 씨와 만년에 함께 살았으며 서울 영등포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만담가 신불출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이다. 신불출 씨는 일제 때 인기가 대단하여 그 분의 단체에 취직했다 하면 다들 출세했다고 부러워 하였다. 나는 신불출 씨 단체에 입단하면서 공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실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0년대 전반기에 나와 함께 신불출 씨의 극단에서 활동한 박천복 씨는 나보다 5,6세 연상(1911년 무렵 출생)으로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고 1950년대에 폐병으로 작고하였다. 박천복 씨는 박춘재 명창과 최경식 명창의 문하에서 경기민요와 재담 등을 배웠다. 박천복 씨는 목성음은 썩 좋지 않았으나 민요를 퍽 구성지게 잘 불렀고 꼽사춤, 만담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박춘재 명창은 광복 후 나와 함께 공연을 한 바 있다.
1940년 무렵에 나와 함께 유랑 극단에서 활동한 김봉업 씨는 줄을 잘 탔고 해금을 잘 연주했다.
문영수, 최홍매, 한인오, 이문원, 서산호주, 김밀화주, 김패수, 표연월, 최섬홍, 이초선, 김춘홍, 이영산홍, 김옥엽, 이진봉, 박월정, 김인숙, 장금화, 김복진, 홍소월, 김부용, 길진홍, 손진홍, 김향란, 설중매, 이은영 씨 등 그밖에 다른 경서도소리 명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신민요 가수 선우일선 씨는 평양 사람이다. 대중가요 가수 김정구 씨의 형인 김영환 씨는 일제 때 영화극 설명의 일인자였는데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 끝)

2000년9월28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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