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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1>
* 이 글은 1996년 엘지미디어(LG소프트)에서 제작된 {최순경 서도소리} 음반(LGM-AK012, 1CD) 해설서 1-5쪽에 실렸던 원고이다.

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1>

증언/이은관(배뱅이굿 인간문화재)
증언 일시 및 장소/1992.7.14.20:00∼20:20(전화 통화)
1996.1.27.17:30∼20:00
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이은관 서도소리 전수소)
대담 및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나 이은관(李殷官, 본명:이은관)은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회산리 92번지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 이윤하, 어머니 길 모(吉 某) 사이에서 태어난 4남 4녀 중 장남이다. 내 위로 누나 둘이 있고 바로 아래 남동생 이은혁, 그 아래에 차례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이은일, 여동생 하나, 막내 남동생이 있다. 막내 남동생은 갓난아기 때 죽었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장수하여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국악을 한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아버지께서는 전문 국악인은 아니었으나 간혹 메나리조로 민요를 부르곤 하셨고 목성음이 무척 좋으셨다.
내가 살던 강원도 이천에서는 경기도, 강원도, 이북 민요가 두루 불렸지만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민요는 주로 이북 소리였다. 내 고향 이천은 행정 구역상은 강원도지만 황해도와의 접경 지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부르던 민요나 무당들의 굿이 거의 이북식이었다. 강원도 이천은 빈촌이라서 굿이 매우 드물었다. 내가 고향 이천에서 굿을 본 것은 내 나이 10대 중반(1930년대 초반) 때인데, 그 때 두 차례 굿을 본 기억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고향에서 이천공립보통학교까지 다니고 외지로 나갔다.
나는 어릴 때 친구 김창재와 함께 어울려 다니며 재미로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18세(1935년) 무렵에 김득수라는 사람과 황해도 황주에 가서 재니(재인)들과 함께 어울려 떠돌이 공연 단체에서 잠시 음악 활동을 했다. 당시 이길수라는 모개비(단장)가 그 단체를 이끌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 구별을 잘 몰랐는데 황주에 가니까 그런 구별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재니)이 상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소리하는 사람은 양반 대우는 못받아도 상놈 취급은 받지 않았다.
내가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황주에서 생활하던 바로 그 시절, 내 나이 10대 후반 때 일이다. 그 당시 나는 황주권번에 소리 선생으로 있던 이인수(李仁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뱅이굿>을 비롯한 여러가지 서도소리를 배웠다. 당시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소리를 함께 배운 동창생으로는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모(某) 씨, 그리고 황덕렬 씨가 기억난다. 지금은 ‘진주’라는 사람의 성씨는 기억나지 않는데 얼마 전까지도 살아있었다.
나는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나온 20대 초반에 장연권번에서 잠시 소리 선생을 했고 종로권번에서 3,4달 가량 활동했다. 당시 나는 요리집에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는데 한번 불려 가면 10원 정도 받았다. 종로권번은 황명선 씨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황명선 씨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종로권번에서 활동했다. 황명선 씨는 나보다 15세 가량 연상이었고 내가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최경식 선생님 문하에서 경기민요와 시조를 사사했다. 그 후 잠깐 고향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왔다. 그 뒤에 가설 무대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박진 씨의 소개로 1940∼1945년 무렵에 신불출 씨가 이끌던 극단 ‘신불출 일행’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신불출 씨의 극단은 주로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신불출 씨의 단체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 이들은 김계춘, 박천복, 신옥란 씨 등이다.
광복 후 나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60년대까지 박천복, 장소팔, 고춘자 씨 등과 함께 유랑 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리고 영화 ‘배뱅이굿’ 주연, 방송 활동, 해외 공연 등을 하며 바쁘게 활동해 왔다.
나는 1982년에 KBS 국악대상을 받았고 198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나의 장기는 역시 <배뱅이굿>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부른 소리가 <배뱅이굿>이고 가장 신경써서 독공한 소리 또한 <배뱅이굿>이다. 내가 현재 부르고 있는 <배뱅이굿>은 대략 1시간 정도로 짜여져 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서도소리는 <배뱅이굿> 외에 <수심가>, <긴 아리>, <자진 아리>, <제전>, <초한가>, <배따라기>, <긴 난봉가>, <자진 난봉가>, <산염불>, <자진 염불>, <경발림>, <놀량>, <공명가>, <맹인 덕담경>, <파경>, <애원성>, <담바귀타령>, <신고산타령>, <개타령> 등이다. <관산융마>, <전쟁가>, <굼배타령> 등 다른 소리들도 배웠으나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굼배타령>은 평안북도 소리다.
<배뱅이굿>의 경우에는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신세기레코드, 대도레코드, 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15차례 가량 취입한 바 있다. 금년(1996년) 봄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배뱅이굿을 영구 보존용으로 비디오 녹화 및 음반 취입할 예정이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신세계레코드, 대도레코드, 지구레코드 등의 음반회사에서 <산염불>, <맹인 덕담경>, <파경>, <애원성>, <담바귀타령>, <신고산타령>, <개타령> 등의 서도소리를 취입한 바 있다.
나는 슬하에 1남 6녀를 두어 모두 출가시켰다. 현재 나는 부인 남상욱과 함께 서울 중구 황학동 1527번지 25통 1반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20여년 전부터 서울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에서 제자들에게 서도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박준영, 인정임, 엄재경, 최병문, 김경열, 박경옥, 김경선, 박기옥, 조금희 등이 있다.
옛 서도소리 명창들은 소리를 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다르게 불렀다. 장단도 다르고 노래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엮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한다. 가능하면 제자들이 배우기 쉽도록 장단, 사설, 성음을 일정하게 정형화 시켜서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몇 명밖에 없는 문하생들 조차도 서도소리는 너무 어렵다며 포기하고 말 것 같았고 서도소리의 명맥을 조금이라도 이어보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승들에게서 배운 옛 소리 외에도 이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에 맞는 민요를 창작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 내가 새로 창작한 <이춘풍전>, <정선애화>와 같은 신곡도 발표할 예정이다.(계속)

2000년9월28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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