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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자균 님께서 국악기록보존연구소의 인터넷 홈페이지 '히어코리아닷컴'(사이버 국악음반박물관)의 원고 청탁을 받고 기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원고는 2000.6.10 디스켓으로 받아 편집하였습니다. 귀한 옥고 주신 이자균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기 무속음악 명인 이갑오<2>
글/이자균(민속음악학자)
예나 지금이나 사주팔자가 그러하면 다 무슨 곡절이 있겠지만 이 조상굿을 하면 이녁이 부채 방울을 든 신세가 기가막혀서 울기도 하고 재가집의 못먹고 못입고 간 조상들의 넋이 들어와서 그러하기도 하고 송곳 끝에 올라 탄 “까장 까장한” 성미를 지닌 이갑오도 사람인지라 울고 싶은 데 뺨 때린다고 제 설움에 제가 겨워서 우는 수가 있어서 호랑이가 인간의 기척에 놀라 깊은 산중으로 갈 즈음에야 조상굿이 끝났다고 한다.
지금은 굿을 해가 솟아 오를 즈음부터 준비하고 굿을 하지만 이갑오가 한창 발에 불이 나게 일을 다닐 적에는 반드시 해가 토끼 꼬리 만큼 남았을 즈음부터 거리부정 치고 대문 밖에서 선부정 치고 이윽고 집으로 들어가서 ‘주당“을 물리고 하였지 눈꼽도 안뗄 때부터 굿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이런 풍습이 많이 남아있지만 도회지에서는 시골과는 풍습이 영판 닯아서 그저 재수굿이나 진오귀굿이나 아무 굿이나 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여류하여 공자 같은 성현도 시속에 좇으라는 말이 있듯 무상할 따름이다.
그러하면 이갑오의 예술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경기도의 세습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굿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점을 먼저 잠시 언급해 두기로 한다.
이런 현상은 전국 어느 지방에나 같은 이치이다. 첫째로 사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경우는 전혀 다르며 둘째로 춤사위나 음악적 구성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고 무의식의 성격이나 상징성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경기도만 보더라도 마을 굿에서나 집에서 하는 굿일 경우도 강신무의 굿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경기도는 동북부 지역과 인천, 부평 지역인 서북부 지역과 한수 이남의 시흥, 안산, 수원, 화성, 남양, 평택, 이천, 여주 등은 비슷한 데가 있으며 서북부 지방이지만 김포, 통진은 조금 다르며 인천이라도 경서동이나 십정동 가좌동 등지는 한수 이남의 무의식과 조금 다르다.
경서동, 십정동, 영종도, 용유도, 장봉도, 떼무리섬, 엇섬, 살섬, 여단포, 윗거짐이, 아랫거짐이(지금 무의도의 옛 지명) 등은 뱃고사가 많은 동네이며 충청도와 가까운 동네인 안성, 평택 등지는 같은 경기도 남부 지역이지만 그 의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고 “징 사위”가 발달되어 있고 광주나 이천 등지는 사설을 주워 섬길 적에도 불사거리에서 “동두칠성 남두칠성”이라고 대는데 다른 지방은 다르다.
또한 같은 경기도 땅이라도 화성이나 수원은 초저녁에 성주를 풀지만 남양이나 평택 등지에서는 성주를 새벽에 하며 안성, 평택 등지는 성주를 앉아서 외장고만 두드리면서 푼다는 점이 다르며 고양, 일산 등지는 마을 굿이나 집 굿에서나 “본향산”을 모시고 나서는 바로 “서낭”을 모신다는 점이 지역적으로 다른데 이 지역은 “서낭”을 조종으로 받들기 때문이다.
과천은 “불사”가 조종이며 수락산을 중심으로 금암산, 봉우뜰, 공덕골, 담터, 납때울, 가재울, 갓바위, 먹골,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궐터, 사로리 등지에는 “군웅”이 조종이며 부평의 만의골, 시흥 새오개 등지는 군웅을 높이 쳐들며 안성 반재리는 성주와 군웅을 제일로 쳐든다.
인천 지역의 서북부 간방인 지역은 같은 강신 계열의 굿일지라도 창부 타령조가 그 음악적 선율이 다른 지방과 조금 다르며 “시나위”도 김포, 통진, 경서동, 고잔동, 부평, 소사 등은 수원, 광주, 이천, 여주, 용인, 안산과 조금씩 다르다.
김포 등지는 그 유명한 평택 태생 오강산(1876-1952)과 증명환(?-?)과 조만봉( ?-?), 조인옥(?-?) 등 작고한 조한춘(1919-1995)의 일가와 양씨 일가들이 단골판을 지니고 있었다.
이갑오는 착실히 익히고 배워서 제자를 두었는데 그 제자가 바로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수원에 사는 용인군 김양장리 태생의 오수복(1925-)인데 만 칠년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은 전수소다 학원이다 해서 집안에서 가르쳐 주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호롱불을 켜고 아주까리 기름을 내 먹던 시절이라서 이런 것은 언감생심이었으며 굿을 하러 갈 적에 칠흑 같은 밤에 논두렁 밭두렁 건너고 마루 마루 재 넘어 서낭을 넘어서 갈 제 솔가지 꺾어서 양손에 갈라 쥐고서 “발림”을 하면 한치 앞 버선발도 안뵈는 밤을 밝혀 가면서 눈 짐작으로 춤사위를 익혔다.
경기도의 세습무들이 굿을 할 적에는 모두 남자가 징도 치고 굿도 하기 때문에 그러나 남자는 신이 내린 이들은 아니며 남자가 먼저 앉아서 청배를 하면 여자가 비로소 일어나서 부채 방울을 들고 춤을 추고 긴 무가를 “시나위” 반주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데 “겹굿”이라고 하며 마을 굿에서 “손님굿”이나 “군웅굿” “뒷전” “별상” 등은 남자가 부채 하나만 들고서 “판패개” 소리라고 해서 판소리처럼 소리를 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선학습꾼” 또는 “선어정꾼”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 굿에서도 새 성주굿을 할 적에는 남자가 긴 서사 무가를 판패개 소리로 하며 “서낭” 역시 “들어온다, 들어온다, 서낭님이 들어온다-” 하며 소리를 하는데 성미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몇날 며칠 밤을 새우고 나서 동지 섣달 분합문도 없는 어느 집에서 굿을 할 적에 재티만 날리는 화로불에 앉으면 이 원수놈의 잠이 쏟아져 눈꺼풀에다 돌덩이를 단 마냥 무거워서 깜박 졸아 징을 치다가도 헛 손질을 하여서 방바닥만 두드리고 있으면 “네 이년 늬이 어머니는 굿 허는데 너는 조느냐?” 하며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부채로 이마를 내리칠 정도로 성미가 괄괄하기도 하였다 한다. 악사들이 술 한잔 마시고서 “오니 섭채” 장단을 재게 치면 장단이 조금 “삐어도” 나는 간다 하며 당신대로 길게 소리목을 뽑아 올렸다 한다.
지금은 상을 차릴 적에 제 각기 차라는 것이 아니지만 이갑오가 굿을 할 때인 1960년경만 하여도 한 거리가 끝나면 상을 철상하고 다음 거리 할 상을 진설하는데 매 거리마다 이런 상을 준비할려니 재가집에서는 허리가 휠 정도인데 거리가 끝낼 적마다 주안상이 들어와서 한잔씩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그 기가막힌 “시나위” 가락을 연주하면 이갑오는 신이 저절로 나서 개미 허리만한 허리에 홍천립을 입고서 오른손에 칠성 일곱 쇠 방울을 들고 왼손에는 부채를 들고서 불사거리나 군웅굿 춤사위를 놀리면 그 자태 거동이 보름달 두둥실 뜬 것 마냥 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듯 봉황이 넘노난듯 용이 죽실을 입에 문듯 기가막혔다 한다.
이런 춤사위를 이갑오는 오수복한테 착실하게 다동다동 다져서 물려주었는데 오는 세월 막지 못하고 가는 세월 잡지 못하여 기흥면 영통리 인계동 산자락 “멋내”라는 곳에 살다가 “인저 내가 늙고 너도 이만큼 잘허니 저승에 가더라도 편히 눈을 감겠다. 남자 춤사위가 또 좋은 게 있으니 오산 샌님(경기도의 선학습꾼이었던 이십세기 마지막 명인명창인 지금은 세상을 뜬 이용우를 일컬음)헌테 가서 깨껴라” 하면서 이용우를 소개시켜 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현재 추고 있는 오수복의 춤사위는 이리하여서 뿌려도 유궁하고 신에도 가득하게 오롯하게 전승되고 있다.(끝)
2000년6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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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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