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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무속음악 명인 이갑오<1>
* 이 글은 이자균 님께서 국악기록보존연구소의 인터넷 홈페이지 '히어코리아닷컴'(사이버 국악음반박물관)의 원고 청탁을 받고 기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원고는 2000.6.10 디스켓으로 받아 편집하였습니다. 귀한 옥고 주신 이자균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기 무속음악 명인 이갑오<1>
글/이자균(민속음악학자)

“저 아주머니 뜬 성 났구먼”하면서 따뜻하게 데운 술 한잔 마시고서 악사들이 늘어지게 “장단 달아놓고서”시나위를 하면 말 붙이기 무섭게 다음 사설을 대니 허둥거리지 않고 “빗청” 가락에 목청을 뽑아 올린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늘에서 내렸다던 화성군 비봉면 어천리 태생의 이갑오이다.
이갑오의 부친은 이봉운. 마치 새가 하늘에서 훨훨 난, 이름은 새 봉자 구름 운자요 안태본은 여주 땅에서 수원으로 식솔들을 이끌고 온 이씨 성이고 본디 타고 난 학습이 빼어나 생전에 학습 없다는 말은 안들은 이렸다.
이갑오는 일본제국주의가 막 이 나라를 삼킬 무렵에 벌써 부친인 봉운이 태기가 있어서 세상을 버릴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 기왕지사 원대로나 살게 해주자고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갑오가 생존해 있다면 꼭 백수가 되는 나이며 뗏장 이불 덮은 지가 삼십 육년이 된다.
본디 이 집안도 대대로 무업에 종사를 했는데 먼저 뼈 마디가 튼실하여 그 내력부터 볼 것 같으면 아까 얘기한 봉운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협률사가 해체되고 각기 제 고향으로 가서 아직도 시골 노인들은 “헹물사”라고 기억하는 단체를 만들 시기에 “구파배우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집에는 옷 갈아 입으러 갈 때나 혹은 무슨 맘이 있어서 그 많던 양귀비와 서시 같은 노류장화를 물리치고서 삼신 할미가 점지를 할려는지 두꺼비 씨름을 하러 가곤 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찬물 한 그릇이라도 떠놓을 자손을 점지하려고 솥에 요령 소리가 날 적에 나라에서 비록 광대 소리는 들을지언정 궁궐에까지 출입하던 소리 광대인 이동백과 목구성이 좋아서 “당창 걸린 년” 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입이 한 발은 나온 송만갑 같은 이와 같이 흐드러지게 판을 벌인 이봉운이 바로 이갑오의 친정 아버지이다.
이봉운의 선대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수가 없으나 전통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을 무척 따지던 사회이라서 중간에 여덟가지 천민 집단에 속하는 일에 뛰어든 것 같지는 않으며 꽤나 연조가 깊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봉운의 대에서는 여주에서 살다가, 다 떨어진 통영 갓에 찬물만 먹고도 이쑤개를 들이미는 그래도 뼈마디가 타고 난 신분인 양반들의 득세에 밀려서 결국 화성 땅으로 권솔을 이끌고 솥을 걸었다.
여기서부터 봉운의 시대가 열리는데 가뭄에 단비 만난 듯 그야말로 비 온 뒤 죽순 돋 듯 담장 덩굴에 댕댕이 가지 넘어가 듯 일취월장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구파배우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면서이다.
여기에 구한말 소리 명창인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고수 한성준 등이 참가하였고 춤에는 한성준보다 십오년이나 위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 태생 김인호(일명:복돌)가 있었고 이봉운은 이 단체에서 줄타기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당시에는 전통 사회의 끝 무렵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기운이 남아 있어서 소리, 춤, 기악 등 각 분야에서 활동을 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봉운은 단연코 줄타기에서는 감히 그 누구가 넘보지 못할 정도로 기가막힌 재주가 있었다.
이 줄타기는 조선조 나라에서는 큰 행사나 작은 행사이거나 으례이 들어 가는 놀음이라서 “거미줄 같은 줄에서 부채를 들고서” 임금을 욕을 하여도 곤장을 맞을 일이 없었으며 썩을대로 썩은 조선조 중기 사회에서 고을의 수령 방백들을 마음놓고 대놓고 욕을 하여도 “주리를 틀” 빌미를 아니 주었다.
이봉운이 어느 정도로 명성이 있었느냐 하면 전해 오는 말이 있는데 노들에서 절두산까지 줄을 매고 한강을 건너 오는데 줄을 워낙 잘 타니까 이를 본 일본 순사가 줄 끄트머리 쯤에 다다랐을 즈음 줄을 끊어버리자 이 때 장단이 긴염불 장단에 뛰어 내렸느냐 아니면 굿거리 장단에 뛰어 내렸느냐로 항간에 입질에 올려서 지금까지도 수원의 국악인들은 얘기를 하고 있다.
물 한사발을 머리 위에 이고서 줄을 걸어 간다든지, 줄 위에서 승무 춤을 춘다든지 서양식으로 마루 운동 같은 “수세미 트림” 같은 것이라든지 공중에서 한바퀴 돈 다음 다시 줄 위로 앉는 것 하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이런 재주를 지닌 이의 후손인 갑오는 전래대로 댕기머리 땋고 다닐 적에, 아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듣고 자란 탓에 시키지 아니하여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게 “죄”는 아니지만 삼신 할미가 점지한대로 남의 집에 가서 살라는 팔자로 태어나 역시 무업에 종사했던 용인군 기흥면 영통리에 산 김봉열의 집으로 귀 밑머리 파 뿌리될 때까지 시집을 갔다.
김씨 집으로 갔어도 친정 동네 까막 까치만 울어도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질 즈음에 “인왕산 호랭이” 같은 시어미한테“ 너는 늬이 부모가 죽었니 맨날 울기만 하느냐”고 지청구를 들으면서 군불 떼는 애꿎은 부젓 가락만 분질러놓아 아궁이에 쳐넣고 어금니를 앙 다물고 무릎을 꿇고서 학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돈 집 오이 깎아 먹는 풍습도 다르다”는 말이 있듯 친정에서 배운 재주와 시집 와서 배운 재주가 그다지 다르지는 않으나, 또 용인의 굿 하는 방식과 수원의 굿 하는 방식이 닯아서 석유 등잔을 앞에 두고서 사설을 외느라고 온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잔주릅이 들고 제법 말 귀도 알아듣고 걸어 다닐 무렵 까막 까치가 게 발 물어서 던져놓고 가듯 어느 때는 일을 하다가도 젖 줄 시각이 되어서 젖이 불면 폭 잠들여 놓은 아이가 포대기에서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배도 고프고 엄마를 찾다가 없으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에 뒤발을 했을 것 같은 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뒤”를 본다고 하고서 측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운 적도 있었다 한다. 또한 새벽 서리 찬 밤에 기러기가 여덟 팔자로 날아갈 제 조상굿을 할 적에 섧디 서러운 “시나위” 가락에 이어서 구수한 “가래조” 장단이 나오면 이내 팔자가 왜 이리 사나워서 부채 방울을 들게 되었는지 이녁의 신세를 한탄해 보기도 하면서 실컷 울기도 하였다 한다.(계속)

2000년6월11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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