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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2000년 여름 발매 예정인 '김영택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3, 1CD, 섭외·기획·해설 집필:노재명) 해설서에 실릴 원고이다.
김영택 명인의 생애와 예술<6>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김영택의 증언에 의하면 수 백년 전에 은률에는 박남새이(별호)라는 탈춤 명인과 철남새이(별호)라는 꼭두각시 명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탈춤과 인형극을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김영택이 예전에 고향에서 본 탈춤은 지금 연희되고 있는 것과 대사나 장단은 거의 같지만 탈 모양, 춤사위 등은 약간 달랐다 한다. 춤의 경우엔 요즘은 각 개인마다 흥과 멋이 개성있게 실리지 못하고 너무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일정한 틀에 맞춰 거의 모두 똑같이 춤을 연습하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멋이 없어졌다 한다. 예전엔 열이면 열이 조금씩 다 다르게 탈춤을 추었다 한다.
일제 때 은률탈춤은 광대들과 일반 서민들이 모두 다 함께 참여하기 좋은 시기인 정월 대보름과 백중에 주로 많이 했고 단오와 추석 때는 농사일 등으로 인해 잘 하지 않았다 한다. 한편 과거 은률, 강령, 봉산의 탈춤은 춤사위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한다.(1998.9.19.16:00∼23:00. 1999.1.6.12:00∼13:50 / 6.22.20:20∼20:40 / 7.3.11:00∼11:20 / 7.9.14:00∼16:00 / 7.10.14:30∼21:00 / 7.16.18:30∼18:40 / 8.26.18:30∼19:30. 김영택 증언)
본 녹음집은 김영택의 첫 독집 음반이며 여러 연주자들의 옴니버스 녹음물을 통틀어 그가 스튜디오에서 정식 취입한 것으로는 제1호 음반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1995년에는 김영택의 피리 녹음이 학술용으로 제작된 ‘이보형 채록 삼현육각’ 비매품 음반에 수록된 바 있다.(한국고음반연구회 HKYCD-01, 1CD, 한정판) 이는 1980년대 초반 이보형이 전국의 삼현육각에 관해 조사작업을 할 때 현장에서 담은 카세트테입 녹음이다. ‘이보형 채록 삼현육각’ 음반에는 황해도 은률 삼현육각 긴/자진염불(도드리)-늦타령(봉완사)-자진타령(허튼타령), 황해도 길군악 돔부리-자진모리가 들어있다.(피리:김영택 장고:양소운 / 총 13분 56초) 그리고 학술용으로 제작된 몇 종의 은률탈춤 비디오테입 등 영상물에 김영택의 피리 연주가 수록된 바 있다.
김영택은 이번에 본 독집 음반 취입시 은률 삼현육각 중 긴염불에 앞서 연주되는 긴영산-중영산-잔영산은 해금, 대금 없이 피리로만 녹음할 수가 없어 제외하였다. 은률 삼현육각의 대금과 해금 연주법은 현재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일이 그리된 것이다.
다만 본 음반 취입시 김영택 명인에게 은률 삼현육각의 대금과 해금 연주를 구음으로 불러 달라고 간곡히 청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이런 부탁은 김영택 명인과 같은 대가에게는 큰 결례인데 워낙 이 분야의 기록 보존이 시급하고 중대하기 때문에 “그것만은 절대 못한다”며 몇번이고 거절하는 김영택 명인에게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애절하게 호소를 했다. 전통사회 연주자들이 사석도 아닌 공석에서 원숭이처럼 남의 영역을 흉내낸다는 것은 당시 아무리 천대받는 신분일지라도 크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영택 명인이 나중엔 그에 대한 기록 가치를 이해하고 긴염불-자진염불-늦타령-자진타령 순서에 맞춰 대금과 해금의 구음을 각각 최선을 다해 불러주었다. 그런데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이끌어낸 그 소리는 당시 녹음실에서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마스터테입에 담기지 못했다. 다만 당시 필자가 스튜디오 안에서 기록 보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촬영한 비디오테입에만 그 소리가 수록되었을 뿐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던 김영택 명인의 한숨소리가 자꾸만 생각나 지금도 죄송스럽기만 하다. 모쪼록 이 녹음이 앞으로 의미있는 자료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만일 통일이 된다면, 그리고 만일 그때까지 이북에 정통 삼현육각을 조금이라도 연주할 수 있는 대금과 해금의 악사가 존재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이 녹음자료들은 보다 값지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하루바삐 이북 삼현육각이 찬란하게 부활되기를 기원한다.
본 음반에 수록된 김영택 명인의 서도소리 가운데 <발림>(발림엮음)은 일제 때 김종조가 취입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녹음된 바 없는 귀중한 것이고 <늘난봉가>, <자진난봉가>, <산염불>, <자진염불>은 요즘 유행하는 여류명창들의 소리와 다른 사설이 많다.
김영택 명인이 본 음반에 취입한 황해도 해주검무 반주음악과 황해도 길군악, 민요 연주 또한 그의 뛰어난 피리, 태평소 기량이 잘 발휘된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병신가>, <변강수타령>은 재담 부분을 받아줄 상대자가 마땅치 않아서 김영택 명인 홀로 노래 부분만 녹음한 아쉬움이 있으나 이 또한 고풍스러운 창법과 드문 사설을 지니고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김영택 명인과 재담소리의 짝을 맞추었던 최경명 같은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와 이런 소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이는 지관팔과 양소운 정도가 아닐까 하고 김영택 명인은 추정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관팔은 최경명에게 한때 서도창을 지도받은 바 있고 양소운은 과거에 최경명과 재담소리를 같이한 바 있기 때문이라 한다. 김영택 명인은 본 음반 취입을 마치고 이런 재담소리의 전승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 박일흥과 안성균에게 앞으로 이 소리를 익혀 보라고 말했다 한다.
김영택 명인의 증언에 따르면 <변강수타령> 가운데 변강수 심술타령 부분에서는 여기 취입된 것 외에도 “설사난 데 개 잡아 먹이기, 백발노인 벗하기, 초상난 데 귀 쑤시기” 등의 사설이 더 있는데 이번엔 이를 생략하고 녹음했다 한다.
본 음반 해설서에 수록된 서도소리 사설은 필자가 녹음을 듣고 채록한 것을 김영택 명인이 최종 검증해준 것이다. 김영택 명인의 말에 따르면 <자진염불>에서 ‘나 여롱’은 황해도 사투리로 ‘나 이렇게’란 뜻이고 <병신가>에서 ‘시대끼’는 황해도식 욕이라 하며 <변강수타령>에서 ‘널뚝같은’은 두툼하다는 의미라 한다.
김영택 명인은 이북에서 젊은 시절을 보낼 때 광대라 하여 무척 천대를 받았다 한다. 한참 나이어린 사람들이 돈에 침을 탁탁 뱉어서 피리를 불고 있는 그의 이마에 돈을 딱 붙이면서 잘 불어라 하는 반말소리는 귀에 박힐 정도였고 그가 젊어서 당한 수모와 고초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한다. 그래서 이같은 일을 그만둔 국악인도 많고 대부분 이 세계의 속사정을 숨기고 입밖에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다 지난 일이라며 응어리진 마음을 툭툭 털어버리고 옛 기억을 되살려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얘기를 들려주려고 애써주신 김영택 명인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필자는 김영택 명인과의 소중한 대화를 통해 북방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당당한 기백, 그리고 인생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광대라는 신분,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인해 북쪽 얘기를 그간 오래도록 떳떳하게 말할 수 없었던 김영택 명인의 가슴속 앙금이 본 조사와 기록 보존작업을 통해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좋겠다.
김영택 명인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된지 20여년이 지나서야, 80세를 넘기고서야 이렇게 첫 독집 음반을 낼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럴듯한 기업체나 공공기관에서 내지 못하고 이렇게 한정판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2∼3장에 마음놓고 가진 기예를 다 녹음하지 못하고 단 한장에 담을 수 있는 최대 허용치 약 75분 정도에 맞추느라 너무나 고생이 많았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김영택 명인은 매일 아침 운동과 산책을 하고 지금도 사냥을 무척 즐긴다고 한다. 며칠전 대만에서 은률탈춤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택 명인에게 안부 전화를 했더니 “또 궁금한 점 있으문 언제든지 오라우”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런 김영택 명인을 대하면서 백발에도 변치 않는 그 호방함을 본받고 싶었다.(1999.8.29.글맺음)
2000년5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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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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