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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률 삼현육각, 서도소리 명인 김영택<5>
* 다음은 2000년 여름 발매 예정인 '김영택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3, 1CD, 섭외·기획·해설 집필:노재명) 해설서에 실릴 원고이다.


김영택 명인의 생애와 예술<5>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본 현장조사 작업시 필자는 김영택이 이북의 작대기재주, 땅재주, 피리 구음법, 여러 장단 장고 연주법, 피리와 태평소의 연주기법, 서도소리 발성법과 <변강수타령>, <배뱅이굿>, <병신가>, <물레질타령>, <몽금포타령> 일부를 들려주고 보여주어 이를 비디오 촬영 및 녹음하였다.
김영택이 젊어서 황해도의 세습 국악인들과 교류할 때 사용한 주요 변말(은어)은 다음과 같다 한다. 이는 평안도 등 여타 이북 전지역의 산이들과도 다 통하는 말이었다 한다. 다음과 같은 산이들의 말은 동일지역의 무당, 장돌뱅이, 걸인 등 특수집단들의 은어와는 서로 각기 달랐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대물림하여 땅재주, 줄타기, 작대기재주, 삼현육각, 탈춤, 서도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광대는 산이라 했고 탈춤패, 삼현육각패 등 산이들의 한 조직에서 으뜸가는 재주꾼(우두머리)은 모개비라 했다 한다. 산이가 아닌 사람은 비개 또는 비개비, 죈내라 했는데 죈내는 놈이라는 의미의 천칭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대기재주와 땅재주는 패고, 줄타기는 거미, 재담소리 중 나오는 이야기 말(아니리 설명)은 마달, 의사소통 때의 말은 남서(또는 서남), 입은 버삼집(또는 서삼집, 서남), 목성음과 창은 피기, 소리꾼은 피기꾼, 만신은 권달, 기생은 짜생(또는 생짜), 걸인은 가열, 할머니는 버털이, 할아버지는 감영이, 장가들기 전인 사람과 시집가지 전인 사람은 돌쟁이, 장가든 사람은 쇈이, 시집간 사람은 해이, 춤추기는 발림, 굿은 정에, 피리는 고초, 대금은 가룻대, 해금은 거이발이, 장고는 고장, 북은 타구, 예쁘다와 좋다란 의미는 간이다, 옷은 버삼, 돈은 건이(거니), 돼지는 유구지, 닭은 뚝쟁이, 쌀은 백세미, 밥은 골숭(걸승), 머리는 두산이, 눈은 저끔이, 코는 마탈이(마타리), 손은 ‘살피’라고 했다 한다. 해금을 거이발이라 한 것은 해금을 연주할 때의 손놀림이 마치 게의 발놀림 같기 때문이라 한다.
또 어떤 연희에서 아무리 잘 놀아줘도 돈이 더이상 안나온다든지 관중의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싶을 땐 이제 이건 그만하자란 의미로 고수가 접서라(또는 접시라, 접시구)라는 변말을 추임새로 했다고 한다. 입을 닫고 말을 그만하자는 의미로는 앞서 언급한 말들을 섞어서 ‘서남을 접시자’라 했으며 재주가 좋다란 말은 ‘패고가 간이다’라 했다 한다.
술, 귀, 발의 변말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태평소는 중국에서 온 악기라서 그런지 이북에선 옛부터 변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다. 황해도에선 태평소를 탈춤 반주, 길군악, 상여 나갈 때, 덜뇌리(농악)에서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영택은 23세 때 징용 모집 얘기를 듣고 지원하여 일본 야마쿠치, 히로시마 등지로 가서 탄광일을 했다 한다. 그런데 스스로 원해서 가긴 갔으나 일이 너무 힘들어 1년 6개월만에 그곳에서 탈출했다 한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 김영택은 이동예술대에 들어가서 장고 연주자로 활동했다 한다.
김영택은 6.25전쟁 때 피난 내려와서 의정부에 정착했다 하며 그래서 현재 김영택의 호적에는 본적지가 의정부 3동 128번지로 되어 있다 한다. 그리고 김영택의 호적에는 생년월일이 1921년 4월 8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경찰이 되기 위해 신고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김영택은 1.4후퇴 직후부터 1년간 유엔 종군경찰관으로 종사했다 한다. 이는 광대에 대한 괄세를 잊고 싶었고 난리통에 돈벌이도 해야 했으며 대우도 좋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 전쟁 혼란기에 김영택은 국악계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 있게 되는구나 싶었는데 경찰이 심성에 맞지 않아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한다.
그후 김영택은 휴전 직전까지 1년 4개월 동안 극동사령부 낙하산부대에 소속돼 있었는데 심하게 훈련을 받고 왼쪽 어깨가 부러져서 제대했다 한다. 김영택은 군부대에 몸담고 있을 당시 부모, 형제도 없이 외롭게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삶이 힘겨워 총으로 자살하려 했으나 정보사에서 미리 알고 설득해서 새 삶을 찾았다 한다.
김영택은 의정부에서 수년간 살다가 도봉동으로 이사하여 12년, 양주에서 수년, 다시 의정부에서 수년간 거주하다가 지금의 거처인 포천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한다. 현주소는 포천군 소흘읍 이동교 3리 623-2인데 1996년에 여기로 이사왔다고 한다. 이 곳에서 김영택은 현재 부인 이춘자, 손자 김현우(김갑천의 아들)와 함께 살고 있다 한다.
김영택은 슬하에 차례로 딸 김재경, 김정은, 아들 김갑천을 두었는데 큰딸은 첫 부인 이정옥(1925년생)의 소생이고 작은딸과 아들은 지금의 부인 이춘자(1933년 충청도 음성 태생)가 낳아준 자식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이정옥, 이춘자, 김재경, 김갑천, 며느리, 사위들은 국악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 한다.
다만 김영택의 둘째딸 김정은이 김영택과 정재국한테 피리를 사사했고 국립국악고와 이화여대 국악과에서 국악(피리)을 전공했으나 지금은 이 일에서 손떼고 가정살림만 하고 있다 한다. 김영택은 자식 마저 국악인이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으나 이제 자신으로서 가문의 세습일을 마감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김영택의 제자로는 그의 딸 김정은 외에도 김영택의 본 음반 취입에 참여한 차모씨 쌍둥이자매(양소운의 손녀딸)가 있다 한다. 본 음반에서 피리와 북을 연주한 이 차모씨들은 현재 국립국악고에 재학 중인데 학교 방침상 이런 데다가 학생들의 이름과 사진을 공개해선 안된다고 하여 본 기록 보존작업의 결과물에 이들을 상세히 소개할 수 없었다.
김영택은 1982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황해도 은률탈춤 반주악사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다. 이에 앞서 1978년에는 장용수가 은률탈춤 고증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한다.
장용수는 전문 국악인은 아니지만 은률에서 오래 살면서 그곳 탈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은률탈춤을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고형을 복원해 내는 데 있어서 양소운 등과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이때 장용수는 연희 절차 등을, 양소운은 춤 지도 등을 맡았다 한다.[계속]

2000년5월6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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