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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2000년 여름 발매 예정인 '김영택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3, 1CD, 섭외·기획·해설 집필:노재명) 해설서에 실릴 원고이다.
김영택 명인의 생애와 예술<1>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김영택 명인은 이북 출신 국악인으로는 현재 거의 유일하게 스스로를 세습 국악인으로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분이다. 그래서 이분의 증언은 이북의 세습 국악인들이 과거에 어떤 예능문화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중대한 자료가 된다. 이에 필자는 김영택 명인과 가진 약 19시간에 걸친 대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김영택(金永澤:본명) 명인은 1919년 4월 8일(음력) 황해도 은률군 일도면 농림리 차유동에서 태어났다 한다. 그의 고조부 이전 때부터 이 마을 토박이라 하는데 차유동은 김영택이 어린 시절을 보낼 당시 약 20∼25가구가 있었고 마을 뒷산 동북쪽으로 선산이 있었다 한다. 김영택 일가는 대대로 국악을 가업으로 삼아온 매우 유명한 세습 국악 집안이라 한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김영택 가문은 갑부집이었다 한다. 김영택이 태어난 차유동 마을에는 평범한 사람은 살지 않았고 약 100여명에 이르는 세습 국악인 가족만 거주했는데 거의 대부분 김해 김씨였다 한다.
김영택의 부친 김성배는 서도소리 명창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의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 서도창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힐 수 있었다 한다. 김성배는 1876년(병자생)에 태어나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4일(음력) 만 74세로 작고했다 한다.
김성배의 남동생 김성보는 국악일을 하지 않았다 한다. 김성보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름이 차례로 김영근, 작은놈(별호), 김영욱이라 한다. 김성배의 사촌 누이동생 김모씨의 딸의 아들이 현재 인천에서 살고 있는데 국악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성배의 사촌 누이동생 김모씨는 김성배보다 7∼10세 연하이며 작고했는데 국악일은 하지 않았다 한다. 김영택의 조부는 김영택이 보지 못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김영택의 증조부 김미꽹(별호) 역시 서도소리 명창이었고 피리에도 능했으며 간혹 대금도 연주했다 한다. 김미꽹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사냥에 매우 능숙했기 때문이라 한다. 옛날에 이북에서 범보다 무서운 것이 범 잡는 ‘미꽹이’라는 지금은 멸종된 짐승이었는데 김영택의 증조부가 화총으로 범을 무려 수십마리나 잡았기 때문에 ‘범 잘 잡는 미꽹이’로 불렸다는 것이다.
김미꽹의 남동생 김오돌 역시 서도소리, 피리, 해금, 대금에 능했고 특히 줄타기에 있어서는 전국에서 일인자 소리를 들었다 한다. 김오돌은 흔히들 ‘오돌이’(별호)라 불렀다 한다.
김영택의 어릴적 이름은 ‘막고’였는데 그의 앞에 형제가 하도 많아서 집안 어른들이 이 뒤로 안낳겠다는 결심으로 그리 불렀다 한다. 또 하필 그렇게 부른 것은 당시 ‘막고’란 담배가 마침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김영택 위로는 차례로 형 김영춘, 누나 김여포, 김부전, 김영삼, 김오째, 형 김영복, 김영록이, 아래로는 차례로 남동생 김영만과 여동생 김영하가 있다 한다. 이 중 김영춘과 김부전은 6.25사변 전에 세상을 떠났고 김영복은 1.4후퇴 때 피난 도중에 굴속에서 불을 피워 놓았다가 작고했다 한다.
김영복과 김영록은 장고를 연주했고 다른 형제들은 국악일을 하지 않았다 한다. 김여포는 모친이 여포에서 시집왔다 해서 이름이 그리 지어졌다 한다. 김여포는 김영춘보다 3∼4세 연하이고 김여포, 김부전, 김영삼, 김오째는 각각 2세씩 차이가 난다고 한다. 김영복은 김오째보다 1세 연하이고 김영복, 김영록, 김영택은 각각 2세씩 차이가 난다고 한다. 김영만은 김영택보다 8세 연하, 김영하는 김영만보다 2세 연하라 한다.
이 가운데 김영춘은 김영택의 큰어머니 아들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김영택의 친모 소생이라고 한다. 김영택의 큰어머니(성명 미상)는 국악과 무관하며 남편 김성배보다 2∼3세 연하였다 한다. 김영택의 친모 장성신은 황해도 중화군 여포 태생으로 국악은 하지 않았다 한다. 장성신의 친정오빠 장기봉은 피리, 장고 연주자였다 한다. 장성신은 남편 김성배보다 16세 연하이고 장기봉은 장성신보다 10세 이상 연상이라 한다.
김영택이 6.25전쟁시 남으로 내려올 때 거의 모든 가족이 함께 오지 못하고 이북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현재 생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 한다. 김영택의 추정으로는 동생인 김영만과 김영하는 현재 이북에 살아있을 것 같다고 한다.
김영택은 어려서부터 부자집 회갑 잔치 등에 자신의 구촌 조카인 김순명과 삼현육각의 쌍피리 연주자로 함께 일을 다녔다고 한다. 김영택은 14세부터 4∼5년간 김순명한테 서도소리, 피리, 태평소, 장고를 배웠는데 주로 황해도 은률 삼현육각과 길군악 가락을 익혔다 한다.
당시 김영택은 진남포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졸업 후까지 이 국악 학습이 계속되었다 한다. 김영택은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 학급 약 68명 가운데 60등 정도를 했는데 학교 공부는 그렇게 하기 싫고 무척 어려웠는데 음악은 귀에 쏙쏙 들어와서 배우는 게 너무나 쉽고 재미있었다 한다.
김영택은 황해도 은률군 일도면 장통리 김순명의 집에서 만 3년간 지낸 바 있고 김순명이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할 때 틈틈히 드나들면서, 그리고 김순명이 회갑 잔치집에 일하러 가면 같이 다니며 김순명이 보유한 국악 전반을 익힐 수 있었다 한다. 김순명이 몸담았던 진남포의 삼화권번은 김영택의 나이 19세 무렵에 없어졌다 한다.
김순명은 김영택보다 20세 가량 나이가 많지만 김영택이 그의 아재비(아저씨)뻘 된다고 한다. 김순명의 부친 김영준은 김영택의 팔촌형으로 김영택이 14세 때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은률 삼현육각의 대금 왕이었다 한다.
김순명은 일제 때 김종조를 능가하는 ‘서도소리 왕자’였고 피리, 해금, 대금, 가야금, 남도소리 등 여러 음악에 두루 능했다 한다. 김순명은 남쪽에서 남도소리를 배워 왔다 한다. 김순명은 바로 밑에 남동생 김순선과 함께 평양의 기성권번, 진남포의 삼화권번, 연안권번에서 소리선생(서도창)을 했다 한다. 김순명은 나중에 정신이 약간 돌았으며 1946년에 작고했다 한다.
김순선은 광복 후 서도소리 <8.15 해방가>를 작곡했다 한다. 김순선의 부인은 옹진 장포 사람이라 한다. 김영택은 김순선이 일제 때 연안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할 때 조교일을 잠시 봐주었다 한다. 지관용(촌 씨름선수)이 김순선한테 <놀량사거리> 등을 잠깐 배운 바 있다 한다.
김순선 밑으로는 차례로 여동생 작은년(별호), 김순애, 남동생 김순찬이 있었다 한다. ‘작은년’으로 불렸던 김모씨는 오빠인 김순명한테 국악을 두루 배웠는데 서도소리와 검무를 특히 잘했다 한다. 김순애 또한 오빠인 김순명한테 국악을 두루 배웠는데 서도소리를 특히 잘했다 한다. 이들 작은년과 김순애 자매는 삼화권번과 안악권번에 소속돼 있었다 한다. 김순찬도 서도소리 명창이었으나 장가들어 이혼하고 순조롭지 못한 삶을 살다 광복 후 반동으로 몰려서 토지개혁 때 총살당했다 한다.
김순명은 슬하에 딸 셋을 두었는데 차례로 이름이 김탄실, 김탄복, 김탄옥이라 한다. 김탄실은 부친인 김순명한테 국악을 두루 배웠는데 서도소리, 검무, 가야금을 특히 잘했다 한다. 김탄복과 김탄옥은 국악일을 하지 않았다 한다. 김순선과 김순찬은 자손이 없었다 한다.
김영택이 김순명한테 배운 서도소리는 <초한가>, <늘난봉가>(긴난봉가), <자진난봉가>, <산염불>, <자진염불>, <발림>, <병신가>, <변강수타령>, <배따라기>, <자진배따라기>, <수심가>, <경복궁타령>, <방아타령>, <양산도>, <공명가>(일부), <놀량사거리> 등이라 한다.
김영택은 이외에도 <물레질타령>(재담소리), <몽금포타령>, <감내기>, <둘리리가락>과 같은 소리를 부르는데 이는 어디서 특별히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흔히 듣고 자라서 자연히 부를 줄 알게 된 것이라 한다.[계속]
2000년5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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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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