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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성우향 증언<1>
* 이는 노재명 저서 『판소리 명창 성우향』(경기 고양:지구레코드, 1998)에 실려있는 글이다.

판소리 명창 성우향 증언<1>
증언/성우향
대담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대담 일시 장소
1994년 3월 7일 19:00∼24:00
서울시 관악구 신림5동 1429-1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5년 4월 10일 19:30∼20:00
전화 통화

1995년 5월 17일 19:00∼20:0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5년 11월 28일 17:00∼18:0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5년 11월 30일 18:00∼20:0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6년 4월 2일 18:00∼19:30
서울여자대학교 바롬교육관

1996년 4월 30일 17:00∼19:00
서울시 소공동 롯데백화점 7층 롯데화랑

1996년 6월 24일 21:00∼21:30
전화 통화

1997년 5월 7일 17:00∼17:30
전화 통화

1997년 5월 21일 17:00∼18:5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7년 12월 29일 17:00∼18:3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8년 1월 10일 13:10∼13:20
전화 통화

1998년 2월 24일 16:30∼16:40
전화 통화

1998년 2월 28일 14:40∼14:45
전화 통화

1998년 3월 27일 13:30∼14:3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8년 5월 8일 12:30∼12:35
전화 통화

1998년 5월 14일 13:50∼14:00
전화 통화

1998년 5월 17일 20:30∼20:40
전화 통화

1998년 5월 20일 17:00∼17:05
전화 통화

1998년 6월 22일 09:15∼09:20
전화 통화

1998년 7월 17일 18:00∼7월 18일 02:2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그 근처 ‘마포갈비’ 식당/성우향 자택

1998년 8월 16일 21:30∼21:35
전화 통화

1998년 8월 22일 15:00∼18:00
서울시 관악구 신림5동 동사무소 3층 대강당

1998년 12월 1일 16:30∼17:30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

1998년 12월 7일 07:00∼07:10
성우향 전화 통화

1998년 12월 8일 15:00∼15:40
성우향 전화 통화


나의 본명은 성판례(成判禮), 예명은 성우향(成又香), 아호는 춘전(春田)이다. 어릴 적 이름은 남희였다. 나는 1933년(호적:1935년) 8월 24일(음력) 전남 화순군 화순면 교리 118번지에서 아버지 성영문과 어머니 김재녀 사이의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다. 본적은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683-65였다가 근년에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으로 변경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성해순씨, 할머니는 정모씨(鄭某氏)이다. 나의 조부님은 전남 장흥 태생이다. 정응민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정응민 선생님과 나의 할머니는 약 10촌 사이가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두 분은 얼굴이 많이 닮았다.

나의 아버지 형제는 8남매인데 부친 위로 성차옥씨, 성못난이씨(女), 성모씨(成某氏, 女), 성국동씨, 밑으로 성모씨(女), 성모씨(女), 성막둥씨가 있었다.

나의 큰아버지 성차옥씨는 명고수일뿐 아니라 정가, 피리로도 명인이었다. 1941년 나는 성차옥씨 문하에서 가곡과 평시조, 단가 <인호상이>를 배웠다. <인호상이> 중간 부분에 <뒷동산> 사설이 나온다. 성차옥씨는 슬하에 12남매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아들 성구봉씨가 국악을 했다. 성구봉씨는 일명 ‘성유성’이라 했는데 정정렬씨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인물이 잘난데다 소리를 무척 잘해서 이름이 났으나 20대 초반에 술과 아편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성구봉씨는 지금 살았으면 한승호씨 정도의 나이가 된다.

그런데 성구봉씨 외에도 큰아버지 성차옥씨가 슬하에 둔 12남매가 모두 일찍 요절하여 나보다 7세가 많은 친오빠 성형래씨가 그 집에 양아들로 보내졌다. 오빠 성형래씨는 현재 생존해 있는데 국악은 하지 않았고 과수원을 했었다. 오빠는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으며 일가족 모두 현재 전남 광주에서 살고 있다. 오빠는 큰딸에게 국악을 시키려 했으나 거부하고 하지 않았다.

성국동씨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큰딸 성계향씨는 판소리와 가야금을 했으며 안기옥씨와 살았다. 성계향씨는 나보다 20세 이상 연상으로서 가야금은 안기옥씨한테 배웠고 판소리는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다. 성계향씨는 원산에서 살다가 부산 동래로 이주하여 고생하다가 과음으로 작고하였다. 성계향씨는 슬하에 외아들 성국일씨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은 그만 요절했다. 성계향씨의 여동생 성미향씨는 국악을 하지 않았으며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성미향씨의 남동생 성수일씨는 국악을 하지 않았으며 서울대 사범대 출신으로 현재 원주에서 살고 있다. 성수일씨의 남동생 성수남씨 역시 국악을 하지 않았으며 고려대 출신으로 똑똑한 사람인데 작고했다. 성계향씨의 배다른 여형제 성금향씨는 나보다 17∼18세 연상으로서 판소리를 했는데 목구성은 없었으나 소리를 잘했고 그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성금향씨는 전남 화순 면장 박모씨(朴某氏)하고 살았는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첫째는 회석(아들), 둘째는 명남(딸)이고 셋째 이름(딸)은 기억이 안난다.

일명 ‘성못난이’로 불렸던 첫째 고모는 능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난 ‘능주 고모’라고 했고 둘째 고모는 나주로 시집을 가서 ‘나주 고모’라고 불렀다. 셋째 고모는 명창 주난향씨의 모친이며 주난향씨의 부친은 일찍 작고하였다. 나의 고종 사촌 언니 주난향씨는 일제 때 유성기음반도 남겼고 대단한 명창이었는데 25세 젊은 나이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주난향씨는 죽은 후 별호가 ‘달속의 언니’였다. 주난향씨는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그 모친이 과부인 처지에 무남독녀 딸까지 잃어서 무척 슬퍼했다. 나는 주난향 언니를 보지 못했는데 전남 화순 태생이며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5명창을 사사한 것으로 안다. 나의 막내 고모는 얼굴이 빡빡 얽었는데 음식 솜씨가 좋고 얌전한 성품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인물마을 태생이며 형제는 밑으로 남동생 김모씨(金某氏)가 한분 있었다. 외삼촌 김모씨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철언씨는 국악을 하지 않았고 차남 김철수씨는 통기타를 잘 쳤다. 그리고 외삼촌의 막내딸 김영자씨는 현재 50대 중반이며 전남 광주에서 이명식씨한테 판소리를 배웠다. 김영자씨는 나의 며느리 원미혜(1969년 生)에게 소리를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 전남 장평에서 살고 있다. 나의 외숙모는 국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외아들 진성환을 비롯해서 조카 등 내 이후 자손 중에는 국악을 하는 사람이 없다.

1942년 무렵 나는 본격적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 당시 내가 살던 전남 화순에 안기선 명창이 판소리를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을 매일 지나 다니며 귀동냥으로 판소리를 듣게 되었고 나중에는 귀에 익어서 따라 부르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안기선 선생님의 눈에 띄었고 선생님께서 정식으로 판소리를 배워 보라고 권유하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판소리에 왠지 흥미가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었다. 당시 안기선 선생님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1년 동안 판소리 춘향가 중 <초경 이경>부터 <춘향모 비는 데>까지 배웠다. 안기선 선생님은 안향련씨의 부친이다.

어려서 나는 집안 어른들 심부름하며 길을 지나다 어디선가 유성기에서 소리가 나면 달려가 나팔통에 귀를 대고 끝날 때까지 호기심있게 듣곤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할 수 있을까 감탄하기도 하고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소리를 잘하게 되면 그렇게 꼭 취입을 해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때 서울서 명창으로 이름난 주난향씨가 집안 사람이라 그 언니 덕분에 우리 집엔 유성기음반이 여러장 있었는데 당시 백락준씨의 거문고, 박종기씨의 대금, 주난향씨의 판소리 등을 집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42년 무렵 나는 박송희씨, 박농월씨, 조신자씨 등과 함께 전남 화순에서 김막동 선생님한테 1∼2개월 동안 승무를 배웠다. 당시 나는 동네 언니들이 춤을 추면 북반주를 해주기도 했다. 김막동 선생님은 당시 50대의 나이였고 작은 키에 빵모자를 쓰고 다녔으며 입이 한쪽으로 돌아갔으나 북과 춤의 대명인이었다. 박송희씨는 옛 이름이 박농주씨였고 그 오빠 박춘섭씨는 가야금의 명인이었다. 박농월씨는 전남 광주(?) 사람으로 당시 18∼19세였으며 박봉선씨(1910년 무렵 출생)와 한 집안이다. 박농월씨와 박봉선씨는 오래전에 작고하였다. 조신자씨는 전남 화순 사람으로 당시 8세 정도였는데 지금은 국악을 작파하고 활동을 하지 않는다.<계속>


2000년5월2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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